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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련 Sep 09. 2023

유아용 애니에 동성 부부가 등장했다

서른 넘은 나도 교육시키는 애니의 발견


매일 아침 어린아이용으로 만들어진 영어 애니메이션을 본다. 나만의 의식 같은 건데, 거의 30년을 한국어만 가득한 세상에서 살았던 뇌에게 쉬운 생활 영어를 들려주며 의식적으로 형성된 영어 뇌를 깨우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위한 애니이긴 해도, 성인도 쓸 만한 표현이 자주 나와서 꽤나 유용하다. 침대에서 일어나면 거실로 곧장 나와 눈을 비비적거리면서도 리모컨을 찾아 TV를 튼다. 유튜브를 켜서 최근에 올라온 회차 중 흥미로운 편을 선택하면, 그렇게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이날 아침도 평소처럼 가장 최근에 올라온 영상을 재생하고 소파에 앉았다.(= 드러누웠다.) 아직 잠이 덜 깨서 맹한 눈을 천장에 박고 애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한 편이 5분가량인 짧은 애니라, 보통 8편에서 12편 정도 합쳐져 있는 영상을 선택한다. 40분에서 한 시간쯤 정확한 발음의 쉬운 영어를 듣고 나면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샘솟는다.



오른쪽에 있는 남자아이가 애니의 주인공이고, 왼쪽의 여자아이는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친구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원생들이 단체로 공룡 박물관에 가는데,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 이 둘의 대화를 듣다가 심봉사가 개안하듯 눈이 번쩍 뜨였다.


선생님 : 여러분, 박물관을 견학할 때 길을 잃지 않도록 짝을 지어 다니세요.

남자아이 : (여자아이에게) 너 나랑 박물관 짝꿍할래?

여자아이 : 그러자. 근데 나는 들어가기 전에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

남자아이 : (여자아이 뒤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너희 엄마 여기 계시잖아?

여자아이 : (쾌활하게 웃으며) 내 말은, 또 다른 엄마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일하는 엄마 : (남자아이 뒤에 나타나) 네가 우리 딸 친구로구나! 나는 공룡 박물관에서 공룡 전문가로 일하고 있어.

남자아이 : 너는 엄마가 둘이야?

여자아이 : 응, 맞아!

일하는 엄마 : (전업 엄마와 나란히 서서) 우리는 함께 딸을 돌보고 있고, 딸을 너무나 사랑한단다.  


남자아이가 "너희 엄마 여기 계시잖아?"라고 물었을 때, 내가 예상한 대답은 '이분은 엄마가 아니라 이모야.'였다. 내 기대가 어긋날 거란 예상은 조금도 하지 못했기에 여자아이의 대답에 무방비 상태로 가격당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지지하겠다고 다짐해도 결국 내 무의식에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가족의 형태는 엄마 한 명, 아빠 한 명인 구성이었구나'라는 걸 깨달아 버렸다. 어린아이용 애니를 보며 항상 동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서른이 훌쩍 넘어 굳어진 고정관념을 유연하게 깨우는 촉매제가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다니는 산부인과에서 가끔 동성 커플을 마주친다. 잘은 몰라도 남자 동성 커플은 산부인과까지 찾아올 일이 없을 것 같고, 내가 마주친 건 모두 여자 동성 커플이었다. 아마 누구의 자궁이 아이를 품기에 적합한지 검사받거나, 혹은 인공 수정을 통해 정자 기증을 받으려고 왔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을 신기하게 보았지만 지금은 우리 부부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보통의 커플로 보인다. 역시 무엇보다 반복된 경험이 중요하다.


얼마 전 한국 최초로 여자 동성 부부가 아이를 낳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내가 살고 있는 벨기에에서 정자 기증을 받았다는 부분을 읽고서는 문득 병원에서 만났던 동성 커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기상 나와 직접 마주치지는 않았겠지만, 그들도 내가 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긴장과 설렘이 섞인 달뜬 얼굴로 대기실에 앉아 있었으리란 상상을 하니 마음의 거리가 가깝게 느껴졌다.


언젠가 다시 이 애니메이션을 봐야겠다. 그때는 한창 말랑말랑한 스펀지 같은 뇌를 가진 아이와 함께 이 애니를 볼 것이다. '우리 00이는 엄마가 한 명, 아빠가 한 명이지만, 다른 친구는 엄마가 두 명이거나 아빠가 두 명일 수도 있어.'라고 말해 줄 것이다. 나처럼 마음속으로는 지지하면서도 낯선 가족의 형태에 움찔하거나, 충분히 나이 먹고 유아용 애니에 충격받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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