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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련 Apr 28. 2018

“그건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Book 7] 혼자의 발견, 곽정은


얼마 전 아이를 낳은 친구의 집에 초대받아 밥을 먹었다.

자연스레 그녀는 아이로 인한 행복에 대해, 나는 조카들과 함께한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갈비찜을 내온 친구는 씩씩하게 밥을 한 술 털어 넣으며 말한다.

“정은아. 아이가 주는 행복이 이렇게 푸짐한 갈비찜 같은 거라면, 조카가 주는 행복은 이거이거, 이 간장종지 같은 거야. 그러니까 너도 조카한테 잘해주기보단 네 아이를 빨리 가져야 돼.”


친구야, 갈비찜 먹게 된 것 축하해.

하지만 모두가 갈비찜을 먹고 싶어도 아무나 갈비찜을 먹을 수는 없는 거야. 갈비찜을 먹고 싶지만 그냥 간장에 밥 비벼먹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네가 낳은 아이가 행복해지는 세상은 아마 오지 않을 거야.


        혼자의 발견, 곽정은 



그건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한국을 떠나 공부하기로 결정하면서 <한국어교원자격>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청소년기나 스무 살 언저리에 유학을 떠났다면 별생각 없이 부모님이 주시는 돈만 가지고 홀랑 떠났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에 와서 그러기엔 양심에 혓바늘이 돋는 기분이라 ‘모을 수는 없어도 최소한의 생활비만큼이라도 벌어야겠다’ 하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한국어교원자격'은 국립국어원에서 인증하는 국가자격증으로 급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꽤 오랜 준비기간이 소요된다. 나는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시험을 쳐야 하는 부류에 속했고, 공부하는 내내 '차라리 외국어를 하나 더 배우는 게 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국어의 위대함과 어려움을 통감했다.


양성과정을 들었던 곳에서는 다양한 나이 대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내 또래인 2,30대보다는 오히려 퇴직 후의 삶을 준비하시는 듯한 나이 대인 분들이 더 많았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최초의 강의이자 특강이기도 했던 그 날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업을 진행하신 교수님은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여대의 국어국문학과 교수님이셨고, 부드러운 서울 말투를 쓰시는 남자분이셨다. 솔직히 말투가 너무 나긋나긋하셔서 중간에 잠이 오기도 했지만 모락모락 풍기는 지식인의 이미지가 왠지 좋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들을 구사하는 사람 수에 대해서 설명하시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가 굉장히 약소국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수천 개나 되는 세상의 언어 중 12위에서 13위 정도의 순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창조한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며.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이고 위대한 언어라는 말씀. 그러고는 잠시 저출산 문제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말씀하셨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구수와 저출산 문제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교수님께서는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요즘 아이를 늦게 낳거나. 하나만 낳거나. 아예 낳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러면 안 된다는 말씀. 가임기 여성들은 반드시 둘은 낳아야 한다는 말씀이 이어질 때.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 자리엔 내 또래 젊은 여성이 굉장히 적은 수였기 때문에 꼭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얼굴이 후끈후끈했던 것 같다.


만약. 그 자리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많았다면 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교수님. 제 출산은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제가 특별히 애국심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일 만은 제가 가장 자신있는 시기에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미 특강을 시작한 지 3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고, 경험상 웃어른에게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의견'이 아니라 '말대답'이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자란 세대는 남자와 여자를 차별한다는 것이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것이 상식으로 퍼져있던 시기였고, 실제로 차별이 있다고 해도 그걸 티 내는 사람은 적었으며, 오히려 남자아이들이 '역차별'을 이야기할 정도로 여자아이들이 대접을 받고 자란 세대이기도 했고, 여자가 집에서 살림만 하는 건 항상 '2순위의 삶'인 것으로 주입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당당하게 '나의 꿈은 엄마가 되는 것'이라 말해본 적은 몇 번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엄마는 큰 의미 없이 들으셨겠지만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엄마에게 종종 "나는 스물한 살에 결혼할거야."라고 얘기했었다. 내 생각보다 7년의 세월은 참 빨랐고, 21살이 되던 해에 엄마는 슬쩍 "너, 스물한 살에 결혼한다며?"라고 큭큭거리며 농담을 했었다. 그 소원은 진심이었지만, '스물한 살'은 나의 반려자가 등장할 운명의 시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 꿈꾸던 스물아홉이 지금의 내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는 건 확실하다. 그렇지만 내 삶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아직 내 주변엔 ‘미혼’이 훨씬 많다. 그리고 미혼인 것을 만족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적당한 직장과 잘 맞는 애인이 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결혼에 대한 계획은 좀 더 뒤로 미루고 싶어 하는 사람들. 우리는 대부분 비슷한 공포를 안고 있다. ‘결혼’과 ‘출산’이 생활로 닥쳐왔을 때 감내해야 하는 무게가 가볍지 않음을. 또한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는 친구들이 나의 도전을 부럽게 여겨줄 때는 으쓱하기도 하다.


그래도 난 언젠가는 꼭 엄마가 되고 싶다. 물론 그 시기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균'에서는 벗어나겠지만 말이다.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그때는 '자신만의 시기'에 맞춰 사는 것을 여유 있게 지켜봐 주는 사회라면 좋겠다. '평균의 삶'이 아닌 '자신의 시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이해하는 포용력이 우리 사회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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