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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련 Jul 10. 2020

'엄마'를 극복하기

[Book 12] 말 그릇



"그릇을 빚다 보면, 자꾸 틈이 생기고 구멍이 보이고 결이 갈라지기 시작해요. 흙의 특성 때문이지요. 그럴 때 번거롭다고 그냥 두면 모양도 흐트러지고, 나중에 구울 때 꼭 깨져버려요.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쓸모없는 그릇이 되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 작업이에요. 틈이 보이면 바로바로 손으로 매만져주고 구멍이 생기면 빠짐없이 채워줘야 해요. 필요 없는 공기거품은 모두 없애야 하고요. 공을 들여 쓰다듬고 매만질수록 그릇이 견고해져요. 그래야 나중에 고생을 덜 해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그릇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 균열을 알아보고 매만지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꾸만 날 선 말이 쏟아진다면, 내 마음의 어느 곳에 날이 서 있는지 알아보는 게 첫 단계인 것처럼. 말을 만들어내는 마음을 살펴서 그 균열을 메우는 것,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릇, 김윤나




'엄마'를 극복하기



"나의 청소년기와 20대를 망친 건 엄마다."라고 말하면 우리 엄마는 상처 받겠지.

아니면 등싸다기를 날리려나.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러하듯이, 우리 부모님도 자신들의 청춘을 갈아 넣어 우리 삼 남매를 키웠다. 건강한 몸이 자랑이자 유일한 재산이던 아빠는 자신의 튼튼한 몸으로 생계를 책임져 오셨고,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그러니까 30대 중반 창창한 나이에 생활용품을 만드는 회사에 취직을 하셨다.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빠가 집에서 나갔을 때, 타지에서 일하느라 그래야만 한다고 들었지만.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아픈 것은 도통 내색하지 않는 아빠와, 자신을 아프게 하면 배로 갚아줘야 하는 엄마는 참 안 맞는 젊은 커플이었다.


아빠는 내가 20살이 되던 해에 집으로 돌아왔다. 한동안은 모르는 아저씨가 우리 집에 사는 것 같아 얼마나 불편했던지. 아빠도 우리와 함께 사는 가족인 것에 적응하느라 몇 달은 걸렸다. 나도 이제 그때의 엄마 아빠 같은 30대가 되었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로 암묵적인 동의 하에 "결혼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놓은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데리고 한 달에 한 번은 아빠를 만나러 갔다. 큰 도시에서 태어나 쭉 자라오던 우리에게는 반딧불이를 볼 수 있던 그곳이 동화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청소년 시기에 아빠를 거의 만나지 못하고 보냈다. 한 달에 한 번, 아빠를 찾아갈 때마다 야외 화로에서 숯불을 올려 고기를 구워주던 따뜻한 기억은 남아있지만 일상적인 기억은 하나도 없다. 그때의 내 기억엔 우리 삼 남매와 엄마가 한 묶음, 아빠와 산속 아래 집이 한 묶음, 섞이지 않는 별개의 기억이다. 엄마와 아빠는 극과 극이다.






엄마의 희생을 먹고 자란 딸로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엄마의 말은 바늘 침 같다. 따갑다. 피하고 싶다.' 상대방이 제일 아플 것 같은 말만 골라서 바늘 열 개쯤을 들고 마음을 콕콕 찌른다.


아빠가 결혼하기 전에 맹장이 터진 적이 있다고 한다. 몸속에서 터지는 바람에 몸살에 오한이 들고 온 몸이 아팠지만 며칠을 참다가 병원에 갔더니, 어떻게 이런 걸 참을 수가 있냐고 의사에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 아빠는 참는 데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아빠가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 엄마에게 손편지를 써서 보낸 적이 있다. 우편함에서 아빠가 엄마 앞으로 보낸 손편지를 발견하고 엄마에게 전해주었다. 편지지 두 장에 검은 잉크로 눌러쓴 글씨가 빼곡한 것을 보았지만, 내용은 볼 수 없었다. 그 편지를 읽은 엄마는 '결국 모든 게 다 나 때문이란 말이야?'라는 식의 말을 했던 것 같다. 도통 화를 내거나 소리 지르는 법이 없었던 아빠가 엄마에게 자신의 상처 입은 마음을 편지로 전했던 것이다.






엄마는 아들 많은 집의 외동딸이었다. 지금도 인구가 3만 명이 되지 않는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목수였던 외할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며 9살까지는 행복했다고 한다. 그런 외할아버지가 30대 후반, 주무시던 중 심장에 생긴 갑작스러운 문제로 돌아가시며 외할머니는 가장이 되셨고, 엄마는 집안일을 맡아야 했다. 외삼촌들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공장에 들어갔고, 그런 상황에 엄마도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몰랐던 외할머니는 가장이 되신 후, 엄마를 그렇게 많이 때렸다고 했다. 밖에서 '남편 잡아먹은 여자'라는 수군거림을 듣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분함을 꾹꾹 쌓아놓았다가 집에 와서 아무 이유 없이 우리 엄마를 때렸다고 했다. 아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왜 굳이 제일 약한 외동딸을 때렸는지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 엄마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다.


현재 아흔이 가까우신 우리 외할머니는 큰 외삼촌네 집에서 사시다가, 지금은 셋째 외삼촌 댁에서 지내고 계신다고 들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느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할머니가 셋째 외삼촌 댁으로 옮긴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큰 외삼촌네 모든 가족이 더 이상 할머니와 살 수 없다'라고 합의를 했기 때문이다. 큰 외삼촌과 외숙모는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처음부터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큰 사촌언니가 5살이 되던 해에 큰 외삼촌이 집안의 재산을 다 날려먹고 갈 곳이 없어서 할머니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촌 언니가 30대 초반, 결혼할 때 즈음까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으니 거의 30년을 함께 지낸 셈이다.


우리 외할머니는 자식이 많은 만큼 손주도 그만큼 많아서 나와 특별한 애정이나 추억이 없다. 할머니의 자식들이 모두 둘, 셋을 낳았으니 나는 그저 평범한 손주, 그것도 외손주였으니까. 할머니의 '금쪽같은 내 새끼'는 큰 외삼촌의 막내아들, 그러니까 나이는 어리지만 집안의 장손, 바로 그 아이였다.


우리 삼 남매도 일 년에 두 번 명절 때마다 할머니를 찾아가 손편지를 써서 드리거나 절을 올리는 일은 잊지 않았다. 모두 명절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황금 같은 휴가를 보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쯤에 할머니의 언어폭력을 목격한 적이 있다. 외할머니와 큰 외삼촌네가 함께 사는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때 엄마와 아빠, 외삼촌들과 외숙모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서 놀고 있었고, 집에는 할머니와 어린아이들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젊은 청춘들은 노래를 부르러 뭉쳐서 나갔고, 집에는 노인과 어린아이들만 있었던 한 명절이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잔뜩 화가 나신 할머니는 큰 외삼촌의 두 딸, 나이로 봤을 때는 우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언니와 그다음의 언니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셨다. '너희들은 내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지? 내가 약값 3천 원 쓰는 것도 아깝지?' 이런 줄거리였던 것 같다. 별로 친하지 않았으니 나에게 외할머니의 이미지랄게 없던 시기였는데,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분명 내가 아는 사촌언니들과 외삼촌네 부부는 그렇게 못된 사람이 아닌데, 할머니는 그 모두를 천하의 몹쓸 인간말종으로 만들고 있었다. 정말 단순하게 할머니를 빼놓고 놀러 나간 자식들에 대한 서운함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일흔이 다 되어가는 노인이 자신의 손주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는 20살이 넘어서 더 심한 사춘기가 왔다. 10대 때는 호르몬의 영향이니 당연하다고 쳐도, 20대 내내 스스로 안정적이라는 느낌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싶어서 인문학 책을, 특별히 심리학 책을 많이 읽었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고장이 났을까?' 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20대에 내가 풀어야 했던 유일한 숙제였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분쟁이 있을 때마다 항상 약간은 아빠 쪽으로 더 기울어서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관계' 속에서 일방의 잘못으로 관계가 망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엄마의 바늘 같은 말투와 비이성적인 행동을 볼 때마다 '반칙'이라 느꼈다.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며 언제든지 건전한 스파링을 겨를 수는 있겠지만, 스파링에 오른 뒤 목을 졸라 숨을 못 쉬게 하거나, 급소를 공격하는 것이 반칙인 것처럼. 엄마의 공격은 항상 반칙처럼 느껴졌다.


난 어릴 때부터 영악한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험한 말을 전해 들었을 때, 한없이 속상했던 마음을 반향으로 삼아 나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게 트라우마같이 남아서 지금도 '욕'이라고 불리는 모든 말들은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욕을 못한다고 해서 상처되는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듯이 '내 말은 항상 사람들을 떠나가게 만들었다.'






책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책을 만난 이후로 내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정확하게 떠올릴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어린 딸은 엄마와 자신을 동일한 존재로 받아들인다. 엄마가 사랑받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사랑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엄마가 학대받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책은 '천천히 생각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완독을 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인데, 그 책은 더욱더 오래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리고 나와 엄마의 관계의 재설정에 대한 필요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엄마가 아니다, 엄마와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다." 우리 둘 모두를 살리는 방법이 필요했다.


내가 '엄마의 미니미'인 이상, 엄마를 미워하며 나를 사랑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려면 '엄마의 미니미'로서의 나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식적으로 엄마와 나를 별개의 사람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뒤 나의 내면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물론 엄마의 몸을 빌어 태어난 내가 완전히 상관없이 다른 존재일 수는 없겠지만, 내가 엄마의 '미니미'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 순간부터 엄마의 인생, 엄마의 좋은 점과 나쁜 점 까지도 객관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었다.






그 이후로 학대받은 엄마의 삶에 눈물을 흘릴 수 있었고, 인간 대 인간으로 엄마를 위로할 수 있었다. 슬픔, 서운함, 미안함 등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러 그저 '화'만 내는 엄마를 보고도 화가 나지 않았다. 아빠의 어떤 행동이 엄마를 서운하게 만들어 또다시 엄마가 언성을 높이면,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엄청 속상하지. 이번엔 아빠가 잘못했네. 혼나야겠네. 근데 엄마, 속상할 때는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속상하다고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심리학 책을 읽어왔다.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가진 질문이 무엇인지도 몰랐었다. 그냥 나에게는 문제가 있고, 그것을 해결하고 싶었다. 한 번 태어난 인생인데 나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죽으면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나에게도 세월이라는 것이 쌓이고, 경험이 늘어갈수록 책에서 찾았던 문구들이 내 마음속에 새싹처럼 하나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새싹들이 자라서 줄기가 되었고, 이것을 큰 나무로 키우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태어난 몫은 다하고 죽는 것이라 믿는다. 愛之欲其生(애지욕기생),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사랑은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지만, 참으로 간단한 것이기도 하다. 그 사람을 가장 그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나는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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