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죠? 저는 잘 지내요
살다보면 문득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귤을 먹다가 떠오른 어린 시절 발바닥이 노래지도록 귤을 먹었던 기억이라든지, 도심 속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다가 제주도에서 스쳐지나갔던 갈대가 생각난다든지, 방금 만난 사람에게서 익숙한 향기를 맡고는 한참을 고민하다 그 익숙함의 근원을 찾아낸다든지 하는, 그런 일들 말이다.
이런 것들은 기억 속에 있다. 조금 딱딱하게 말하면 뇌 속 어딘가에 저장되었다가 때때로 꺼내어 재생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기 기억에서의 인출인 셈이다.
이전 글들에서 밝혔듯, 나는 3번의 폐쇄병동 입원과 몇 차례의 낮병동 생활을 했었다. 꽤나 힘들고 나빴던 기억으로 묘사했었지만, 우리네 기억들이 늘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나빴던 기억도 조금씩 희미해져 버리고 이내 좋았었던 혹은 나빴지만 지금은 좋아보이는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폐쇄병동과 낮병원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적이 2017년이니 벌써 3년 정도 되었다. 3년이 흐른 지금, 입원했었을 때의 느낌과 분위기는 점차 추상적으로 변해져 간다. 강렬했던 사건, 깊이 느꼈던 감정들만이 응고되어 남고 나머지는 흐려져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희미해짐 속에서도 이따금 선명하게 내 마음을 두드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3번의 입원과 몇 차례의 낮병동 생활을 포함해 약 수백명의 사람을 만났다. 의료진, 실습하러 나온 간호과, 의전대 학생들, 입원한 환자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제 이름도, 얼굴의 잔상조차 남지 않았지만 이름까지 고스란히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3번째 입원, 가장 많은 기간을 입원했었던 그때. 12월 24일에 입원해서 새해를 병동에서 맞이했던 그 시기에 같이 입원해 있었던 사람, L(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이니셜로 표기합니다).
L은 나보다 먼저 입원해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입원해 있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입원했을 때, 중증의 우울증이었던 L은 병실에서 나오지 않았고 나 또한 심한 우울의 끝을 달리고 있을 때라 병실에서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일 주일 쯤 지났을까. 어느새 우리의 동선이 겹치기 시작했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수 차례의 마주침이 이어지고 연령대가 비슷했기에 한 두 마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TV를 보고, 탁구를 치고, 책을 읽고, 병동 프로그램을 해도 남는 시간은 많았고 병동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기 때문에 '대화'는 잉여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수단이었다.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건, 그녀가 아버지와 갈등이 심하다는 것, 무엇을 해야할 지 잘 모르겠고 대학을 가지 않았지만 - 그 당시에 아마 그녀의 나이는 22살이었을 것이다 - 딱히 가고 싶지는 않다는 것 등. 누군가는 그녀에게 우울증 답지 않게 - 우울증 환자라면 늘 얼굴을 우중충하게 하고 다녀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 밝아 보인다고 했지만 나는 어렴풋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그녀의 우울을 느꼈다.
그럼에도 내가 그녀에 대해, 그녀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가 남긴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노래', 그리고 그녀가 그려준 '그림'이다.
어느 날, 서로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주로 팝송을 많이 들었던 나와 그렇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서로 공감할 만한 노래는 없었다. 노래에 대한 대화를 끝낼 무렵, 그녀는 내게 치즈(CHEEZE)의 노래를 추천해 줬고 꼭 들어보라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다.
입원할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었기에 - 단순한 기능이 있는 MP3와 전자시계 이외의 전자기기는 반입할 수 없었다 - 가수의 이름과 노래 제목을 기억했다. 후에 퇴원하고 나서 그녀가 말해줬던 노래를 찾아보았다. 노래의 제목은 <퇴근시간>. 재즈풍의, 딱히 내가 이전에 좋아하지 않았던 느낌의 노래를 가만히 들어보다 가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나는 매일 똑같은 밥을 먹는 것도 아니고 / 나는 매일 똑같은 얘길 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오늘이 특별한 날일 수도 있는데 / 나는 왜 또 이리 외로운지
가끔 만나는 사람들은 내게 이런 말을 해 / 얼굴이 많이 좋아졌네 무슨 좋은 일 있니
좋았던 일도 있었고 안 좋은 일도 있었죠 / 근데 왜 안 좋은 일은 안 묻나요
그대가 아는 것만큼 난 좋은 애가 아니에요 / 나쁜 생각도 잘하고 속으로 욕도 가끔 해요
웃는 내 모습이 좋다면 슬픈 나도 좋아해 줘요 / 난 그대 우는 모습도 좋거든요
우린 완벽하지 않고 가끔 억지도 부리는 걸 / 때론 마음이 너무 아파 푹 주저앉고서 울곤 해
(...)
내가 뭘 잘못했는지 / 이젠 기억조차 안 나는
이 무거운 새벽공기에 / 쌀쌀해진 난 슬퍼져
하염없이 말 없는 / 전화기에 눈을 떼지 못하고
먼저 다가가기엔 / 내 맘이 어려워지는 걸
노래가 끝날 무렵 낯선 멜로디, 인적이 드문 어스름한 새벽길을 걷는 듯한 느낌의 노래 속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찾을 수 있었다. 남들이 잘 느끼지 못하고 볼 수 없었던 우울의 그림자를 내가 알 수 있었던 이유, 노래 속에서 발견한 익숙함은 그것이 내 안에도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지금도 종종 듣곤 하는 <퇴근시간>을 들을 때면, 어김없이 그녀 생각이 난다. 나중에는 제법 친해져서 서로 장난도 쳤던, 온통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던 시간 속에 미약하긴 하지만 다른 색을 칠해 볼 수 있게 해준 사람. 퇴원한 후에 낮병원에서 만남을 이어갔지만 이제는 마지막 만남으로부터 3년이 된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까.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언젠가는 그녀의 이름도 희미해지고 입원했던 날짜도 잊을 때가 올 것이다. 다만 "그 눈동자 입술"은 그녀가 내게 알려준 노래와 그려준 그림 속에 깃들어 있다가 기억의 무덤 속에서 자신의 자취를 다시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내 서늘한 가슴에" 다시 한 줄기 따듯함을 불어 넣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