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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ubris

울며 겨자 먹기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 선택하기

by Argo

오늘 아침에 산책 하러 문을 나서니 우편함에 선거 유인물이 꽂혀있었다. 생각보다 두툼하지 않은 봉투를 집안에 들여놓고 산책하러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코로나로 몇 달째 온 세계가 아우성이다. 수십 만명이 감염되고 그보다는 적지만 상당히 많은 생명이 그 무게를 다 감당하지 못하는 사망자 '수'로 우리 곁에 남고 있다. 인류 역사상 큰 피해를 입혔던 '페스트', '스페인 독감'에는 못 미치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공포와 함께 불안, 안타까움을 느낀다.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건 비단 코로나 뿐만이 아니다. 이제 2주도 채 남지 않는 선거 또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촛불 시위로 온 나라가 들썩들썩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에 못지 않은 갈등이 넘실거린다. 뭐,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안정적이었던 해가 얼마나 있었겠느냐마는.


아주 늦은 저녁을 먹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밤 산책을 했다. 비워진 음식물 쓰레기 통을 가지고 들어와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다 지역구 국회의원과 비례정당 유인물을 살펴봤다. 내가 사는 곳의 후보들은 4명, 비례정당은... 뭐가 그리 많은 걸까. 죄다 밥먹고 정치만 할 건지 정당이 정신없이 많았다. 문득 드는 생각. 이 사람들은 이거 만들 돈을 어디서 구했을까? 종이 낭비 장난 아닌데? 역시 정치도 돈이...


최근 지지하게 된 정당은 매우 아쉽게도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에 없었다. 그 정당에서 나왔다면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뽑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유인물을 보다보니 아까의 아쉬움보다 더 큰 허무함과 답답함이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내가 후보자, 비례정당을 살펴보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1. 정책이 '현실적'인가.

2. 안보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3. 결격 사유, 특히 범죄 여부나 병역 이행, 재산 정도는 어떤가.


비례정당은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정당이 있기에 조금 편했다. 물론 '상대적으로' 편했다는 거지 딱히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 같이 현실성 제로에 어느 한쪽으로 지극히 편향된, 당장 '오늘만 산다', '이번 정권만 잡고 보자'식의 정책들이 넘쳐나고 시류에 편승하는 척 청년 후보 등 특정 계층의 표를 얻으려는 모양새가 읽히니까 불편함을 넘거 약간의 역겨움마저 느껴졌다. 비례대표 1순위로 여성후보를 내세우면-거의 모든 정당의 1번이 여성이었다-여성친화적인 정당이라고 어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최연소 후보가 있다고 광고하면 그 정당을 청년 정당이라고, 청년을 위할 수 있는 정당이라고 생각해 줄거라 믿는 걸까? 이런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반복되었다.


요즘 읽고 있는 <진보 집권 경제학>에서는 보수 경제학이 주장하는 '한정된 자원'이라는 전제가 허구라고 말한다. 나름의 설득력이 없지는 않지만 내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만 들렸다. 이론으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한 해 예산은 '정해져' 있다. 그 안에서 각각 분야별로 예산이 배정되고 집행된다. 때문에 중요도에 따라 예산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분야별로 배정되는 예산이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가 이번에 하는 선거가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거고.


정책의 현실성이라는 조건 앞에 대다수의 정당이 소위 '포퓰리즘'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공수표를 남발한다. 전 국민에게 재난소득 얼마, 무슨무슨 배당금, 무슨무슨 지원금 등등. 어느 정당의 공약에 따라 전국민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할 경우 수십조원이 필요하다는 '단순' 계산이 나온다. 숨이 턱 막힌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는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수 정권이 등장해도 영국의 대처 수상이 했던 것처럼 대대적인 복지 감축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복지'는 기본적인 것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복지가 좋은 걸까?


나는 복지를 반대하지 않는다. 사회 안전망이 확충될수록 국민의 기본권이 지켜지고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라 본다. 현 코로나 사태에서 볼 수 있듯, 우리나라가 비교적 '선방'하는 이유도 복지 - 특히 의료제도 -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의 복지 제일주의를 우려하는 걸까?


앞서 말했듯 현실적인 국정 운영에 있어서 자원은 한정적이다. 세금은 한 순간에 늘어나지 않는다. 뭐, 우리나라에서 세계에서 순위권에 들만한 천연자원 - 천연가스나 석유 -이 발견된다면 말이 다르겠지만 그럴 일은 제로에 수렴한다. 기업들이 내는 세금 - 세금을 제대로 내는 기업이 없는 게 문제긴 하다 - 도 일정 수준으로 유지된다. 아마 올해는 전 세계적인 경제지표의 악화를 예견할만한 코로나 사태로 세금이 줄면 줄었지 늘지는 않을 것이다. 부유층에게 세금을 물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 대게 진보정당에서 주장하는 '부자 증세'는 내게 '약탈적'으로 느껴졌다. 부자라고 다 나쁜 방법으로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진보 진영에서 부자, 대기업을 일종의 악의 축으로 여기는데 물론 그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 부분이 있기에 그런 시선을 이해는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정 계층에게 일종의 '희생'을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 어쨌거나 재산에 상관없이 그들 또한 대한민국의 일원이니까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 '부자 증세'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복지의 영역이 확대되는 건 그만큼 소모될 재원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역사를 보면 지나친 복지 정책의 증가로 재정이 파탄난 사례를 여럿 볼 수 있다. 영국의 대처 수상이 복지를 줄인 것 -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만 재정 건정성의 측면만 본다면 괜찮다고 볼 수도 있는 - 또한 그런 이유에서였다. 복지를 현행수준으로 유지하거나 더 추가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재원 마련 방안이 필수적이다.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증세, 특히 중산층을 포함한 부유층의 증세다. 북유럽 국가들처럼 누진세 - 벌금을 포함해 - 를 실시하면 상당 부분 해결될 것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수입의 5~60%가 세금이다. 때문에 무상교육이나 각종 지원책이 가능한 것이고. 하지만 이게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받는 건 좋은데 내기는 싫으니까. 간단한 해결책 만큼 간단한 거부 사유다.


나는 6.25 참전 용사, 그것도 학도병 참전 용사의 손자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상처를 수시로 보아왔고 상처뿐인 훈장, 젊음을 가져간 대가로 받은 훈장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때문에 진보를 지지하던 때도 북한에 대한, 안보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게 북한은 한민족이라는 개념보다 다른 나라, 특히 우리나라를 침략한 존재에 가깝다. 진보 진영을 종북세력, '빨갱이'로 매도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북한에 대한 입장은 단호히 거부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앞서 말했듯, 여러 정당에서 내놓은 정책에는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복지 정책이 없는 정당이 거의 없으므로 정책의 현실성에서는 골고루 낙제점이다. 그러면 다음 조건인 '안보'로 넘어가야 하는데 이 조건을 보고 정당을 선택하자니 그 정당이 딱히 잘하지도, 잘할 거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안보' 문제를 제쳐두자니 이 문제가 제쳐둘 만한 문제는 아니고... 진퇴양난이다. 특히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비주류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비례정당으로 뽑긴 하겠지만 중도 정당의 한계상 메인 세력은 되지 못할 것이다. 지역구 국회의원에 이 정당이 없으므로 결국 다른 정당의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데 여기서 '선택장애'를 넘어 '선택불가'가 되버린다. 이런 제기랄, 욕 나온다.


결국 마지막 조건으로 넘어간다. 4명의 후보 중 한 후보는 1번에서 걸러졌기에 3번 조건, 범죄 여부와 병역 이행에 대해 살펴본다. 여기서 두 후보가 날아간다. 둘 다 음주운전으로 벌금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작 100만원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시라. 사람이 술 한 번 먹고 그럴 수 있다고? 내가 알기로 음주운전은 습관적이다. 그리고 음주 운전은 다른 중대한 범죄 - 예를 들면 살인이라든지 - 에 비해 다소 '가벼워' 보일지라도 엄연히 범법행위이고 이런 것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국회의원으로서의 자격이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음주 운전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 행위라고 생각한다. 고작 술마시고 운전한 게 아니라는 거다. 음주 운전으로 운전자는 살아 남고 피해자는 사망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봐왔다. 고로 1명의 후보만 남았는데...................................


민감한 독자라면 저 점들에 담긴 의미,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물건을 사거나 사람을 만날 때 - 특히 연애 상대의 선택 - 아주 좋아해서, 내가 생각한 조건에 맞아서 선택하는 경우가 아닐 때의 느낌이 어떤 지 알 것이다. 나름 괜찮은 점을 찾아서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고 자꾸 미련이 남는다. '이게 최선일까'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 건 덤이고. 내가 지금 그렇다. 이 후보를 선택하는 건 정말로 좋아서가 아니라 소거법에 의한,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이기 때문이기에 만족할 수 없다. 게다가 이 후보의 정당을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행사한 한 표가 자칫하면 그 정당에게 잘못된 인식, 그러니까 자기네 정당이 잘해서, 좋아해서 뽑아준 거라고 착각할까봐 두렵기도 하다.


언젠가 "민주당에는 민주가, 자유한국당에는 자유가, 정의당에는 정의가 없다"는 댓글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웃어 넘겼던 이 말이 지금은 통렬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민주, 자유, 정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최고의 가치이자 지향해야 할 궁극이것만 무지개처럼 아름답고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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