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집권 경제학> 서평
이 책은 진보 경제학 - 책에서는 제도 경제학, 비주류 경제학으로도 표기 - 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진보 경제학'이라는 말이 생소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진보 경제학이란 신고전주의경제학, 즉 성장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경제학과 반대되는 이론으로 현재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신고전주의경제학에 빗대어 비주류 경제학으로도 불리며 학파마다 차이는 있지만 '제도'를 이론과 정책에 중요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제도 경제학으로 크게 분류기도 한다.
저자는 지금까지 비주류로 분류되어 있는 진보 경제학의 입장에서 진보 경제학이 어떤 것인지, 어떤 학자들이 있고 그들이 이룬 학파의 주장이 무엇이며 기존의 신고전주의경제학과 무엇이 다른지 비교하며 서술한다. 한 마디로 진보 경제학의 개론서, 입문서, 영업서(?) 역할을 하는 책이다.
개론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첫째, 이 책은 진보 경제학 뿐만아니라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저자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기초로 세워졌다는 것을 기본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첫 장부터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의 인문학적 토대, 자연과학적 토대를 먼저 살펴본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경제학의 뿌리를 살펴보고 그 줄기와 가지가 어떻게 뻗어 나가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이 이론에서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하는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런 주장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이론적 근거에 대해 배우다보면 경제학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질 뿐만 아니라 사고의 폭이 깊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또한 경제학이 여러 학문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해왔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두번째, 개론서라면 대게 해당 학문을 처음 접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쓰여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개론서는 되도록이면 쉽게 작성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매우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저자는 경제학이라는, 다소 진입 장벽이 있는 학문을 독자가 가급적 쉽게 접근할 수 있게 경제학 입문의 큰 어려움 중 하나인 수식과 그래프에 대해 친절히 설명할 뿐만아니라 도표와 요약 정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다양한 이론들을 소개하고 있고 제도 경제학이라는 큰 분류 안에 공통점 만큼이나 차이점도 명백한 여러 이론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면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적절한 타이밍에 각 이론이나 해당 챕터의 내용 중 정리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 도표로 정리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셋째, 저자의 말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비주류에 속하는 진보 경제학에 대한 전문적인 책이 부족한 실정을 감안할 때, 체계적으로 진보 경제학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해당 경제학에 관심이 있었으나 제대로 알 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경제학에 대해 내공이 부족한 내가 봤을 때도 꽤나 정리가 잘 되어 있었고 각 이론의 핵심이나 각각의 이론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잘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 집권 경제학>이라는 제목 답게 진보 경제학에 대한 내용과 함께 왜 진보 경제학이 주류가 되어야 하는지, 더 나아가 진보 세력이 정권을 잡고 '왜', 그리고 '어떻게' 진보 경제학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할 지를 역설하는 책이다. 이 말은 이 책이 '진보'라는 특정 관점에서 경제학과 현재의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해석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저자는 기존의 경제학, 보수 경제학과 주류 경제학으로 불리는 신고전주의경제학을 비판하며 진보경제학의 이론적 우위를 설파한다. 아직 경제학에 대한 이렇다할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에 학문적 근거를 기반으로 저자의 주장이 어떠한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선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저자의 주장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과 책 전반에 대한 비판점을 다루려고 한다.
첫째, 저자는 시종일관 보수 경제학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접근을 보인다. 보수 경제학=악, 진보경제학=선 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정도로 말이다. 더 나아가 진보 경제학을 지지하는 사람을 깨어 있는 시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은연 중에 비하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런 부분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보이는 행태, 즉 자기 진영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비난하고 자신들만 깨시민인 듯 여기는 진보 지지자들과 똑같다. 심지어 저자는 특정 계층을 지나치게 매도한다. "특히 돈독이 오른 고소득 전문직, 일중독에 빠진 고숙련 기술자, 잔소리와 통제로 고액연봉을 챙기는 '고위직', 이 모든 꼰대들이 청년세대에게 노동의 기회를 분배할 수 있도록 노동시간과 정년을 제한해야 한다."(206p)
둘째, 저자는 이스털린의 역설를 기반으로 고소득층에게 분배를 '강요'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자신의 행복은 물론 사회 전체의 행복증진에 기여하지 않는 무익하고 해로운 고소득층의 과잉저축은 중,저소득층에게 분배되어야 한다."(206p)
고소득층의 수입, 재산을 정책으로 강제하여 재분배하는 것을 고소득층이 선선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스털린의 역설은 인간의 욕구, 욕망이 무한하지 않고 어느 기점으로 둔감해진다는 것을 밝혔을 뿐, 그것이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통계는 통계일 뿐이다.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물질적 규모가 나라마다 다르다고 했는데 그 지표도 '평균치'일 뿐, 각 나라 안에서도 그 금액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단지 통계적 수치에 따라 고소득층에게 분배를 강제하고, 분배하면 모두가 행복할 거라 말하는 건 논리적 비약일 뿐만 아니라 저자가 경계한 '단순화'의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고소득층이라고 해서 저소득층에게 자신의 부를 응당 나눠주어야 한다는 건 사유재산권을 비롯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거에 불과하다. 고소득층 입장에서 그들이 과잉소득으로 인해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누구의 생각인가? 다짜고짜 그들에게 '너희들의 돈은 너희의 행복에 악영향을 주니 우리가 재분배해서 모두의 행복을 늘릴거야. 너한테 좋은 일이니까 따라와!'라고 말하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한 공산주의의 폐해와 다를 바 없다. 지주들을 인민의 적이라 규정하고 그들의 재산, 심지어는 목숨마저 뺴앗았던 과거를 반복하려는 것인가? 그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사회적 합의, 고소득층이 납득할 만한 논리가 있어야 한다.
셋째, 저자는 고소득층에 대해, 그들의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논리에 갇혀 또 다른 프레임 싸움을 하고 있다. 이른바 '깨어 있는 시민', 깨시민 전략이다. 저자는 은연중에 진보 경제학을 지지하는 사람, 또는 이 주장을 지지해야만 깨시민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법은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상대편에게 불쾌감을 줄 뿐더러 진보 진영이 비판하는 프레임 정치, '색깔론'의 재탕일 뿐이다.
니체는 "사람들은 어떤 의견이 전달되는 어조가 맘에 들지 않을 때 그 의견에 종종 반대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야 '깨시민'이라 말하는 것은 자칫하면 오만함의 절정으로 보일 수 있다. 대화와 타협이 갈등을 해결하는 민주주의적 방법이라는 것을 떠올릴 때, 논리와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 일종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주장은 확고한 지지자와 함께 격렬한 반대파를 만들고 국론을 분열시킬 것이다.
넷째, 내가 볼 때 저자는 '열린계'에 대한 지나친 긍정적 확신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 인구수 감소, 기후 변화 등 다양한 요소가 개입할 경우 소득주도성장, 분배 중심의 경제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경우 성장과 복지(분배)의 순환을 통해 성장했으며 이 기간은 수십 년동안 지속되어 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정치가들은 노사 협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내 생각에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정권이 아니라 다수의 국민, 특히 고소득층을 아우르는 국민 전반의 동의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설득력과 합의를 이끌어내기까지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다. 자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만 설득한다면 국론 분열은 피할 수 없고 프랑스 혁명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극렬한 저항과 심지어 개혁마저 실패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 책의 장점과 비판점에 대해 적어보았다. 특정 관점에서 쓰여졌지만 - 그래서 비판점이 존재하지만 - 경제학에 대한 신선한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 경제학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제 막 경제학을 공부하려는 사람, 진보 경제학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