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나의 빛

<창작과 비평> 의 촌평 <교육의 변방, 변방의 교육>을 읽고 나서

by Argo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은 이 글을 접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저자의 이력이 워낙 화려한데다 그 내용이 내 흥미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번 촌평을 읽으면서 얼른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내가 알고 있던 정보는 저자가 골수(근본주의) 모르몬교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 그래서 제대로 된 교육과 의료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것. 이런 환경임에도 불고하고 그녀는 대학에 진학했고 '빛의 세계'로 나왔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이번 촌평을 통해 조금 더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저자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다. 저자만큼은 아니더라도 근본주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던 나는 매우 종교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커 가면서 비합리적인 부분과 억압적인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고, 소위 '신앙'이라든지 '믿음'에 대해 의구심이 커져 갔다. 결국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무신론자로 변모했고,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고집과, 신앙이라는 이름의 광신, 훈육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가차 없이 폭로하는 주인공이 미국 외부에서 유입된 난민이나 망명자 등 흔히 떠올리는 '소수자'가 아니라, '자유와 번영'의 상징인 미국 내부에서 자생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 백인가족 공동체가 보여주는 폐쇄성과 극우적 편견, 광신이 결국 미국의 '줄기세포'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촌평에서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문득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무신론에 대한, 무신론자의 삶에 대한 책이었는데 여기서는 유럽에서 무신론자 비율이 유신론자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지적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무신론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미국도 점차 무신론자의 비율이 늘어가고 있지만 이것은 비교적 젊은 세대에 국한된 일 -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대학에 가면서 무신론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이고 아직까지 전체적으로 볼 때 유신론, 특히 기독교인의 비율이 더 높다고 한다. 때문에 공공의 영역, 정치의 영역에서도 종교적으로 편향된 스탠스를 취하는 경우도 많고 비합리적이고 맹신적인, 광신에 가까운 사고도 흔하다고 한다. 무신론과 무신론자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 뿐만 아니라 명백한 적대적 행위 - 작은 마을의 경우에는 대놓고 문제 있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고 따돌림을 하는 경우도 있다 - 들도 있다고 하니 촌평에서 지적하는 "미국의 '줄기세포'"가 어떤지 잘 알 수 있다.


또한 나는 촌평에서 이 책과 저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한 내용이 가장 인상 깊었다.

<결국 이것은 강인하고 당찬 소녀가 '악마에 사로잡힌 미친년'이라는 가족의 낙인을 무릅쓰고 자기만의 삶을 개척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가족의 전통이 개인의 성장과 독립을 폭력적으로 가로막는 이야기이고, 가족에 대한 도리와 자신에 대한 도리, 혹은 가족 공동체와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이야기다. 이 자서전이 독특한 또다른 이유는, 저자를 학대한 과거가 여전히 강력한 현재로 살아남아 있고, 따라서 그가 걸어온 '배움'과 투쟁의 여정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나 또한 유신론자에서 무신론자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내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서도 여러 압력과 소외를 경험해야 했다. '악마에 사로잡힌 미친년'이라는 비난을 받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비난 혹은 회유 등을 겪었고 기존에 소속되어 있었던 종교 공동체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무신론자임을 선택하고 이를 드러냄으로서 나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특히 미국에 비해서는 비교적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한국이지만 기독교가 대다수인 나라에서 무신론자는 불쾌한 질문들을 받기 쉽다. 조금 교양있는 종교인들 - 이런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게 슬픈 현실이다 - 은 종교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존중하는 태도로 자신의 신앙이나 신념을 강요하지 않는다. 반면에 대다수의 몰상식하고 맹신적인 종교인들은 무작정 자신들의 신앙과 자신들이 믿는 신의 절대성과 절대선을 강조하며 무신론을 비난하거나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기도 한다.


저자가 말한 교육에 대한 촌평의 평가도 좋았다.

<즉 삶에서 무엇을 교육받는가가 가장 중요하며, 대안적 공동체가 국가 시스템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보다 더 나은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면 그것은 더이상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이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하는지, 교육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 나아가 왜 모든 교육은 언제나 '대안교육'이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광신과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 자신의 상태를 좀더 큰 맥락에 놓고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것, 어떤 지식도 최종적인 결론을 내려줄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 나의 자유와 동시에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 결국에는 이런 것들이 배움의 목적이지 않을까.>

저자도 그랬겠지만 어린 시절의 교육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다. 의식적인 종교의례 뿐만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비가시적인 종교의 영향력은 사고와 행동 전반에 스며들어 의식과 무의식을 통제한다. 나는 한때 창조론을 진실인 것으로 믿고 살았고 논리적 혹은 이성적인 판단보다 종교적 계율에 의해 죄로 규정된 것을 의심없이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추후에 무신론자가 된 이후에도 사고 과정에 있어서 이런 부분들은 큰 장애물이 되었다. 지금은 비교적 자유로워졌지만 "광신"과 "편견"을 벗어던지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들었다. 종교적으로 '옳은' 것과 사회 규범으로서 '옳은' 것, 그리고 이성과 합리,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옳은' 것이 무엇인지 판별하고 그럴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은 힘들기도 하지만 내게는 유익한 일이었다.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기에 어렴풋한 이미지만 가지고 이 책을 평가하기는 섣부른 감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이 책은 매력적이다. 마음 같아서는 저자와 직접 대화를 하고 싶을 정도니까. 조만간에 꼭 읽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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