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Hubris

시차

한국에서 파리의 시간 살기

by Argo

보통 한 공간, 어떤 지역에 살게 되면 그 주위의 사람들과 비슷한 시간대를 산다. 저마다 하는 일은 달라도 생활 패턴은 비교적 비슷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침'이라고 생각하는 '시간'에 일어나 학생은 학교를, 직장인은 직장에 나간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시간에 식사를 하고 역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자야할 시간에 잠든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시각은 새벽 1시 반.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야할 시간, 혹은 이미 잠들었어야 하는 시간에 글을 끄적이고 있다(정확히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누군가에게 잠을 자야할 시간이 내게는 일을 할 시간이다. 나는 이곳의 사람들과는 다른 시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루를 살아간다.


내 나이대의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그들과 나의 하루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출근이 빠른 직장인일 경우 5~6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12시 무렵에 점심을 먹고 그 후에는 일정에 따라 퇴근을 하든지 아니면 야근을 한다. 다음날이 평일이면 출근을 위해 늦어도 새벽 1~2시에는 잠을 청한다. 바이오 리듬, 혹은 일출과 일몰이라는 시간적 흐름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일어날 시간에 침대로 향한다. 조금 일찍 자면 새벽 4시, 늦으면 7시다. 당연히 기상 시간도 늦다. 보통 5~7시간을 자는데 대략 점심 무렵에 침대에서 기어 나온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간이 내게는 아침이다.


점심인데 점심이 아닌 시간에 일어나면 컨디션이 썩 좋지는 않다. 뭐랄까, 마치 중력이 두 배로 작용하는 듯한 느낌? 시차 장애(시차 부적응)을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이게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하긴, 주위 사람들과 나는 대 여섯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와 비슷한 시차다.


같은 나라에 살면서 다른 시간대를 산다는 건 나름의 유익과 아쉬움이 있다. 한국에서 새벽이라고 부르는 시간은 내가 가장 활발한 시간이자 글이 잘 써지는 시간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잠에 빠져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비교적 조용하다. 덕분에 나는 조용한 가운데 집중해서 글쓰기를 비롯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하루 중에서 집중하기 좋은 시간을 찾는 것만큼, 무언가를 하기 좋은 시간을 갖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에서 다른 시차, 파리에 사는 것처럼 사는 방식은 자신에게 맞는 하루를 산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일반적이지 않은 시간의 흐름은 주위와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소소하게는 야식을 먹고 싶은데 배달 가능한 음식점이 없다거나 - 저녁을 늦게 먹으니 야식 생각도 늦게 나는데 보통 새벽 1~2시면 치킨집도 문을 닫느다 - 오전 약속은 부득이한 경우, 예를 들면 병원 진료 같은 일이 아니면 잡을 수 없다. 오전은 내게 새벽이나 다름 없으니까.

또한 오후 - 혹은 저녁 - 에는 낮잠 시간, 시에스타라고 이름을 붙인 - 본래적인 의미와는 관련이 별로 없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다 - 수면 시간을 갖는다.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세 시간 정도 자고 나면 비로소 시차 부적응이 해소되면서 점차 맑은 정신으로 변한다(수면 보충과 담배는 훌륭한 시차 부적응 치료제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오후에 느끼는 기분이 내게는 저녁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식사 시간을 비롯해 다양한 부분에서 다른 사람들과 시간 활용이 다를 수 밖에 없어서 일정을 잡거나 공공기관 방문 등에서 곤란을 겪기도 한다.


이런저런 장단점이 존재하는 독특한 나만의 하루 중에서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면 그것은 새벽 산책이다. 보통 마지막 담배를 피러 나가는 시간을 뜻하는데, 조금 이르면 밤 11시, 늦으면 새벽 1~2시다. 조용하고 한산하다 못해 텅 빈 거리를 걷다보면 차분한 분위기에 동화된다. 만약 심란했던 하루라면 걷는 동안 날뛰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고 안정된다. 보통의 날이었다면, 평소에 구상하던 글을 생각하거나 이런 저런 상념 속에서 걷는다. 늘 음악을 듣기 때문에 귀를 간질이는 멜로디와 가사와 함께 걷는 시간은 휴식의 시간이자 고민의 시간이고 창조의 에너지를 기르는 시간이다.


며칠 전에 쓰다만 이 글의 초고를 완성해 가는 지금 시각은 아침 6시 11분, 창 밖은 벌써 밝아져 해가 나오려고 한다. 어제는 오전에 병원 예약이 있어서 오랜 만에 일찍 - 물론 그래봤자 10시라는 게 함정이지만 - 일어난 탓에 하루 종일 피곤했다. 아무리 일찍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아서 결국 똑같은 시간에 잘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평소처럼 일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슬슬 잘 준비를 해야겠다. 누군가에게는 굿모닝이지만 나에겐 굿나잇인 시간. 이제 자러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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