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참마속을 아십니까?
"내가 실제로 따르는 원칙을 알려주겠다.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마다 진심을 다해 쓰도록 하라. (...) 사랑하는 것을 죽여라."
- 아서 퀼러쿠치
소설이든 수필이든 그 어떤 글이든 초고를 그대로 세상에 내놓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작은 오탈자부터 비문 삭제까지, 프로의식이 있는 작가라면 그리고 능숙한 글쟁이가 된 사람이라면 퇴고 과정을 반드시 가질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여서 어떤 글을 쓰든 퇴고 과정이라는,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주는 시간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다. 초고 작성 또한 적잖은 힘이 들지만 비교적 흥미진진한 모험과 같다면 퇴고는 오로지 고통만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퇴고를 종종 퇴고退苦, 즉 고통 속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사랑하는 것을 죽여라"라고 말한 아서 퀼러쿠치의 말은 이런 내적 번뇌에 휩싸일 때, 그리고 퇴고 과정에서 맞딱뜨리는 회피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내가 늘 기억하는 말이다. 퇴고 과정에서 가장 힘든 일은 초고를 쓰면서 이 부분은 꼭 넣어야 겠다고 벼르던 부분, 쓰다가 '어 이거 정말 좋은데?'라고 생각했던 부분 등 글 속에서 '부분적'으로는 괜찮지만, 아니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영 아니올시다 하는 내용을 삭제하는 일이다. '읍참마속'이라는 사자성어처럼 눈물을 머금고 삭제할 때마다 심장에 무리가 온다.
퇴고와 비슷한 경험은 또 있다. 지난 달에 벚꽃 사진을 수백장 찍어두고 편집을 미뤄두다 오늘에서야 하게 되었다. 아이패드 화면 속 사진을 들여다보며 선별과정을 거치는데 삭제하긴 너무 아깝다, 그래도 이 부분은 괜찮으니까 편집하거나 잘라내면 쓸만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휩싸였다. 아예 망작이면 과감히 삭제하는데 부담이 없는데 미묘하게 거슬리지만 또 나름 괜찮아보이는 사진들을 앞에 두면 마음이 약해진다. 2/3 정도 선별과정을 마치면서 200장 정도의 사진을 삭제했는데 2차 선별과정에서 마음이 약해져 지우지 못한 사진을 또 지워야한다.
사진이든 글이든 결과의 완벽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과정에서 얼마나 힘이 들었든, 얼마나 큰 애정을 쏟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마지막에 내놓은 결과물이 완벽한지, 이것이 최선인지만이 중요할 뿐. 작가들이 대게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매번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야 하는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술이 필요하겠지. 헤밍웨이는 어떤 작품을 39번이나 수정해서 완성했다는데 그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꼬꼬마 작가인 나는 39번을 수정해 본적도 없기에 그저 감탄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