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기
오늘날 정신건강 철학은
인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가치체계가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의 짐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만들어온 것이다.
- 이디스 와이스코프 조웰슨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는 것은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의 하나이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미국의 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은 선거에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사용했다. 당시의 상황을 명쾌하게 꼬집은 이 말은 그를 당선으로 이끌었다.
'소확행'이라는 말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좋게 보면 우리가 평소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행복을 찾아서 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소확행'이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 부정적인 느낌 또한 드리워져 있다. '소소함'과 '확실함'을 찾기 시작했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절망적이고 불확실하다는 반증이니까. 최근 일본에서 대두되고 있는 '사토리 세대'와 비슷한 느낌이다.
행복, 누구나 원하지만 쉽게 가질 수 없고 느끼지 못하는 감정. 심리학의 대중화와 맞물려 시중에 쏟아져 나오는 책들의 대다수의 주제는 크게 보면 '행복',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것인가'다. 자존감을 키우든, 자기 계발을 하든 이 모든 것은 행복이라는 주제로 귀결된다. 이런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이 그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행복'이라는 감정의 추상성 - 행복을 정의하는데 성공한 학자는 거의 없다. 최근 '몰입'을 행복에 근접한 상태라고 정의하기도 하지만 만족스러운 결론은 아니다 - 을 뒤로 하더라도 행복이 인간에게 가장 핵심적인 가치라고 하긴 어렵다. 시련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면 불행한 것이고 그래서 반드시 이런 '부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이 되어야 가치 있는 삶인 것일까?
나는 여기에 단호히 "아니요"라고 말한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은 무지개와 같아서 잡으려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멀어지기만 한다. 행복은 절대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또 그럴 수도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으로서 무자비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그곳의 처참한 상황, 모든 가족을 수용소에서 잃은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를 창시했다. 그리고 수용소에서의 경험과 로고테라피의 개관을 담은 책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제목은 한국에서 번역할 때 붙인 것이고, 원제는 <Man's Search for meaning :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인간에게 의미, 삶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의미를 찾는 인간의 의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의미를 향한 추구, 시련을 견디게 한 의미에 대한 탐구를 읽다보면 인간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 동시에 그런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의 의지에 감탄과 경외심을 갖게 된다.
프랭클이 갇혔던 수용소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환경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고된 노동과 식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음식들, 수시로 자행되는 구타와 언제 가스실로 보내질 지 모른다는 불안감의 반복. 생존을 위해 타인을 짓밟기도 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해야 하는 장소가 수용소였다. 인간의 삶이 행복에 달려 있다면 과연 이들은 어떻게 될까? 이들에게는 언제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도 없다. 그저 주어진 하루를 버티고 삶을 이어나가는데 애를 써야 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그러므로 지금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들의 삶은 부적응에 가깝고 더 나아가 무의미한 삶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랭클은 인간의 주된 관심은 쾌락이나 고통에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의미'다. 자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가 중요하지 불행이나 행복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 진보한 - 이전보다 행복해야 할 요소가 더 많은 - 현대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실존적 공허'를 지적하면서 삶에 대한 권태, 자살의 증가, 공격성, 중독증, 우울증의 원인을 여기에서 찾는다. 한마디로 '의미의 부재'가 곧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176p)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다." 이 문장은 앞에서 프랭클이 말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새에게 고통과 시련에 가깝다. 안전함을 상징하는 알을 깨는 것은 당장의 안전함을 포기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겪게 될 문제들, 예를 들어 먹이를 찾지 못해 굶거나 천적에 의해 공격당할 위험을 감수한다는 의미다. 행복을 안전과 편안함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기준에서 새는 알 속에 숨어 있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새는 결국 알을 깨고 나오고 기꺼이 그 위험들을 감수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의미다. 니체가 말했듯,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미란 과연 무엇일까. 행복한 삶이 아닌 의미 있는 삶을 목표로 한다면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의미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 "이것이 당신의 삶의 의미입니다"라고 말해줄 수 없다. 이 의미는 각자가 찾아야 하고 또 그 선택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한다.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으며 투쟁에 가깝다. 새가 자신의 세계인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때로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 스피노자가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어렵다"라고 말했듯 의미와 그 의미를 실현시키는 과정 또한 그렇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을 고해, 즉 고통의 바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행복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최선이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희박하기 때문이다. 행복의 희소성이 우리로 하여금 행복에 매달리게 하는 것이다. 행복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행복에만 집중하는 삶은 오히려 행복과 멀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나는 행복한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행복이라는 무지개만을 쫓기에는 우리의 삶이 짧으며 우리는 허공이 아닌 단단한 대지에 발을 딛고 서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