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날 때까지 무병장수하렴
할아버지 회고록 작업이 막바지다. 인쇄소에서 보내온 가제본을 보니 이제 정말 거의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직 끝난게 아니다. 수십 번의 수정을 했건만 크고 작은 수정거리가 넘쳐난다. 가제본에는 넣지 않았던 발간사를 첨부하고 오타 - 이건 정말 지겹게도 나온다 - 나 비문을 고치다보니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언젠가 책을 낼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처음이 다른 사람의 책이 될 줄은 몰랐다. 원고를 받아 수정과 편집에 매달리다 보니 편집자의 애환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며칠 동안 모니터 앞에 앉아 수정 작업을 하면서 몸도 몸이지만 - 한동안 괜찮았던 목과 허리 통증이 심해지고 손목과 팔목도 일상 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아프기 시작했다 - 정신도 꽤나 지쳤다. 급기야 머리가 띵하면서 백지 상태로 돌입, 작업을 중단하고 밖으로 향했다. 담배라도 피면 괜찮아질까 해서.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원체 사람들과 다른 시차를 살기에 체감 시간이 다른 건 알지만, 저녁인데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게 이상해서 시계를 봤다. 10시가 넘었다. 저녁보다는 밤에 가까운 시간이라는 것에 벌써 그렇게 됐나 싶었다.
Sia의 helium을 들으며 길을 걷다가 무심코 바닥을 봤다. 방금 딛은 왼발 조금 옆에 작은 나무토막이 있는 게 보였다.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다가 문득 '나무토막인데 꼬리랑 다리 같은 게 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졌다. 나도 모르게 뒤돌아 자세히 보니... 나무토막이 아니라 파충류로 보이는 '무언가'가 그 자리에 있었다.
처음에는 뭔지도 몰랐고 죽은 건가 싶었다. 그래서 살짝 건드려보니 움직이길래 도로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녀석을 포획했다. 정체는 몰라도 계속 거기에 있으면 사람들에게 밟히거나 로드킬을 당할 게 뻔하니까. 버려진 종이컵으로 획 낚아챈 다음에 이름 모를 무언가의 신원을 확인했다. '도마뱀인가? 아니, 도마뱀이라기엔 머리가 뭉툭하고 꼬리가 좀...' '혹시 이게 도롱뇽?'
모르는 게 있으면 정보의 바다에 접속하는 게 현대인의 도리. 나는 도롱뇽을 검색했고 - 도룡뇽, 도룡롱으로 찾아봤던 건 안 비밀 - 내가 포획한 녀석과 똑같은 모습의 도롱뇽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네 이름은 도롱뇽이구나!
내가 사는 동네는 도심지와 떨어져 있고 산이랑 맞닿아 있다. 공기가 좋은 건 물론이고 아침이면 각종 새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뻐꾸기, 심지어는 딱다구리의 소리도 들린다.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텃밭 쪽에는 고라니까지 내려온다고 하니 광역시가 아니라 마치 농촌 같기도 하다.
여기에서 10년을 살면서 볼만한 생물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도룡농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 만나본 생명체를 한참이나 들여다 봤다. 왠지 모르게 이 녀석이 귀여워 보였다. 잠깐 요놈 한 번 키워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룡뇽에게는 자연이 더 어울릴 거라는 생각에 근처 개울가에 조심히 방생해 주었다. 마음 속으로 '잘가렴. 다음에 만날 때까지 무병장수하고!' 라는 말을 읇조리면서.
도롱뇽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 보내면서 문득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생각났다.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물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하루 종일 모니터 화면만 쳐다보다 우연히 마주한 도롱뇽은 자연의 싱그러움을 느끼게 해주었고 비록 작은 생명체이지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에 뿌듯했다.
도롱뇽과의 아쉬운 헤어짐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작고 통통한 몸체를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그 덕인지 푹 쉬고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밥을 먹은 뒤에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도롱뇽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이러자고 회고록 한다고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라는 생각만 들었는데 지금은 할아버지의 회고록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뿌듯하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성취하는 삶도 보람이 있는 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삶 또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이제 다시 수정에 매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