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Hubris

이혼과 평화조약

다른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by Argo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7장 48절*의 각주에는 "평화조약"이라는 단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코멘트가 달려있다.

"그리스어 dialysis는 '이혼'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48 플라톤의 말은 훌륭하다. 게다가 사람들에 관하여 담론할 때는 지상의 사물들을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관찰해야 한다. 집회, 군대, 농사, 결혼, 평화조약, 탄생, 사망, 법정의 소환, 황무지, 다양한 야만족들, 축제, 애도, 장터. 이 모든 것의 혼합과 상반된 것들의 질서정연한 결합을.)


글을 쓰다보면 단어의 어원을 탐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간단해 보이는 단어도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보다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동정(compassion)'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탐구하기 위해 여러 언어를 살펴본다. 그 과정에서 동정이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밝히고 이것이 소설에 무게감을 더한다. 단어의 뜻은 그만큼 중요하다.


명상록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단어의 뜻이 여러 개, 심지어 그 뜻이 확연히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뜻으로 번역하느냐에 따라 문장과 해당 구절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바뀌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런 경우에 모국어를 사용할 때와는 다른 시각과 느낌을 받곤 한다.


그리스어 dialysis가 평화조약과 이혼이라는 사뭇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신기하면서도 이 둘이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생각을 했다. 평화조약은 '다른' 국가가 전쟁이 끝난 뒤에 맺는 조약이다. 대게 '평화'를 위해 전쟁을 그만 두고 싶을 때 성립된다. 전쟁을 끝낸다는 의미가 담긴 평화조약과 이혼은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기에 나는 이 둘이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일까?


이혼은 결혼 생활의 끝을 의미한다. 표면적으로는 "무엇인가를 끝낸다"라는 점에서 평화조약과 이혼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보다 심층적인 이야기다. 평화조약이 평화를 위해서 맺는 것이고 전쟁의 종식을 의미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이혼은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고 어쩌면 불행하거나 전쟁 같았던 시간들을 끝내고 '평화'를 위해 맺는 협정과도 같다.


이혼은 왜 하는가? 대게 결혼 생활을 위협하는, 각자의 삶과 행복을 파괴하는 갈등이나 차이로 인해 이혼을 선택한다. 이혼은 자신들의 결혼이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음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이다. 이 결과로 한 방향을 걷던 두 사람은 이제 각자의 길을 걷는다.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이혼을 부정적으로, 혹은 비극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혼을 불행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하고 일종의 '흠'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단호히 이런 생각을 부정한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이혼보다 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비극적이기까지 한다. 부모의 이혼이라는, 간접적으로 이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혼의 부정적인 측면 - 이것은 결혼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 또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의 크고 작은 갈등과 성격, 경제관, 원가족과의 관계, 교육 수준, 결혼 전 사회경제적 차이 등을 보며 자란 나는 언젠가 우리 가족이 이혼을 할 거라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고, 행복할 수 없었다. 장기간 지속된 가정폭력으로 인해 막을 내린 결혼 생활의 결과, 즉 이혼의 결과로 나와 엄마는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 - 나보다는 엄마가 사회적인 낙인이나 주변인의 시선에 더 힘들어 했다 - 을 겪어야 했지만 동시에 진정한 '평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언제나 불편하고 불안하며 갈등을 상징했던 집이 이제는 안정과 평안을 주는 장소로 변했다. 우리는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밝히고 갈등이나 의견 충돌이 있다해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한다. 예전에는 절대로 상상해본 적 없는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 같은 사랑, 전쟁 같은 결혼 생활의 끝이 이혼이라면 이것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를 뜻하지 않는다. 서로의 만남, 그간의 결혼 생활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이 전쟁을 끝내자, 서로의 행복을 위해 '평화협정'을 맺자는 게 이혼이라면 지나친 것일까? 언젠가 이야기 했듯, 이혼은 불행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나의 행복, 상대방의 행복, 모두의 행복을 위해 하는 것이다.


예전에 읽을 때는 스쳐지나갔지만, 이번에 필사하면서 깊이 생각하게 된 그리스어 dialysis. 평화조약과 이혼이라는 뜻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단어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