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외로움 사이에서
어제부터 내린 비는 오늘도 간간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대지를 촉촉히 적셨다. 오후 5시에 시작된 나의 잠은 11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꿈도 안 꾸고 깊이 잠들었다 일어나니 잠은 깨었어도 정신의 한 가운데는 몽롱함이 가득했다.
언제나 늘 그렇듯 몽롱함에 대응하는 내 방식은 담배이기에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설마 비가 올까 싶었지만 다행히(?) 우산을 써야 했다. 많이 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맞을 만큼은 아니었기에. 우산을 펴고 한참을 걷고 있는데 방금 전에 피운 담배로는 부족했는지 하나 더! 라는 마음 속 외침이 들렸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우산을 내려 놓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적막함. 비는 여전히 흩뿌리고 있었고 지나가는 차도 없어서 이곳에는 오로지 나만 존재하고 있었다. 비오는 날이면 더 자주 듣게 되는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만이 나와 함께 있을 뿐.
그러다 문득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집에 있는 걸 즐기는, 그러니까 혼자인게 좋은 나에게 엄마는 간혹 외롭지 않냐고 묻는다. 사람과 함께 있지 않아도 잘 지내는 나를 외향적인 엄마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걸까. 외로움이란 단어를 느끼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그제서야 이 단어가 생각날 뿐, 스스로 느끼기에 외로움은 나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비가와서 센치해진 탓인지, 아니면 빌리의 노래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예전에는 외롭지 않냐는 물음에 '응? 난 아닌데?' 이런 정도로 외로움에 대한 생각을 멈췄다면 오늘은 '진지하게', '각을 잡고' 외로움에 대해 고민했다. '과연 나는 외롭지 않은 걸까? 근데 외로움이 뭐지?'
빌리 아일리시의 모든 노래를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 그래도 대부분의 노래를 들어봤고 좋아하는 노래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다 - 그녀의 노래를 듣다보면 핵심적인 정서가 '외로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목소리에서, 노래의 분위기, 그리고 가사에서 그녀 특유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어쩌면 오늘 내가 외로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그녀의 노래 덕분일 것이다. <watch>, <when the party's over>, <everything i wanted>로 이어지는 선곡 속에서 노래에 담겨있는 외로움, 상실에 대한 슬픔,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결핍. 외로움은 무언가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기 다르지만 보통은 애정, 인간적인 친밀함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어린 시절에 받았어야 하는, 필요한 친밀감의 부재가 외로움이라는 정서를 낳게 되고 이것은 성장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문제, 거의 모든 문제는 이 부재에서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들러의 열등감에 대한 견해 또한 부재와 관련이 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보상하기 위해, 즉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에 힘을 쏟는 것. 이 또한 부재에서 비롯된 일이고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결국 결핍된 무언가를 채우고 보상하기 위해 애를 쓰다 마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받지 못한 애정, 채워지지 못한 친밀감을 찾아 타인을 갈구하고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그로 인해 생긴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것으로 보완하려고 노력하는 행위는 인간에게 결핍이 얼마나 중요한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꺼져가는 담배의 불씨를 응시하다 다시 하나 더 꺼내들었다. 비 사이로 흩어지는 연기가 눈에 들어오고 이제는 나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의 연장 선상이므로, 현재의 내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과거와의 대화가 필수적이니까.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나는 지금 피고 있는 담배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왜 담배를 피는 것일까. 스트레스를 받거나 정신을 깨울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하는 도구로서의 의미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게 담배는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담배에는 내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준 기억이 담겨 있다.
약 10년 간 외가와 함께 살았었다. 형과 달리 나는 꽤 오랜 기간 할아버지, 할머니 속에서 자랐고 특히 할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할아버지를 아버지처럼 생각하면서 자랐고 지금도 롤모델 중 하나로 삼고 있다. 그만큼 할아버지가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건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니까.
지금은 끊으셨지만 할아버지는 이따금 담배를 피셨다. 신문을 읽으시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시거나 무언가를 하신 뒤에 담배를 피셨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언젠가 나는 담배를 피며 어딘가를 바라보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봤던 적이 있다. 아직 외로움이란 감정이 무엇인지 알기 힘든, 일곱살 무렵의 나는 그때 어렴풋이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느꼈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모호한 이 느낌이 외로움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할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외로움을 느꼈던 것일까. 최근에 마친 할아버지의 회고록에서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회고록에서 알게 된 할아버지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유년기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가난 속에서 학업을 이어가다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 큰 부상을 입고 제대했다. 그 뒤에 갖은 노력 끝에 유한 양행에 입사, 중졸이라는 학력 - 고등학교 재학중에 참전하여 중졸로 학력이 끝났다 - 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을 견디며 정년 퇴직까지 쉴새 없이 달렸다. 할아버지의 인생은 결핍의 연속이었고 그 결핍 속에서 치열하게 저항하고 견디며 살아낸 것이었다. 부상으로 오른쪽 다리의 뼈들이 산산조각이 나 20개월을 병상에서 보냈으나 기어코 다시 걸었고 중졸이라는 학력에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대졸자보다 더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평생을 어머니와의 사별과 학도병으로 참전하면서 잃어버린 학창 시절, 전사한 동료들로부터 기인한 외로움 속에서 살아왔다. 한창 전쟁 중에 특별 휴가를 맞아 참여한 어머니의 제사날에 무덤 앞에서 "어머님 품에 안긴 마음으로 실컷 울었다"는 문장은 지금도 볼때마다 눈물나게 한다. 할아버지는 평생 이 외로움 속에서 산 것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회상,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조금 알게 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뒤로 하고 내가 떠올린 건 나의 '상실'이었다. 그 무게는 다르지만 나 또한 할아버지와 같은 상실의 경험이 있다.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는 아빠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고통들. 이중에는 내 유일한 안식처인 외가를 떠나야 했던 슬픔과 아버지로부터 당했던 신체적 정신적 폭력도 있다. 나는 내 친밀함의 근원을 빼앗겼고, 내가 바랬던 애정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내 과거로 인해 현재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내가 억압하거나 부정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건 아니다. 외로움이란 부재를 '인식'하고 강렬한 감정을 느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재를 인식하면서도 해소해야 하는 감정이 없으며 그래야 한다는 강박 또한 없다. 흔히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 오히려 사람들에게 집착하거나 쇼핑 중독을 비롯해 다양한 면에서 강박적인 행동을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한 욕구도, 그와 관련이 있는 행동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여기에 '고독'이라는 단어를 붙여본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고독과 외로움은 전혀 다른 감정이다. 외로움만큼이나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게 고독이지만 사실 고독은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에 가깝다. 고독에는 '독립적인'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폴 틸리히는 외로움과 고독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한 말을 남겼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두렵다거나 괴롭지 않다. 혼자 지내는 시간들, 사람을 만나지 않는 시간들 속에서 내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여기에는 즐거움과 행복 - 추상적인, 모호한 단어이긴 하지만 - 을 느낀다. 혹여라도 내가 혼자 지내는 것이 불편하거나 답답하고 무료함을 느낀다면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 내가 굳이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던 건 혹시나 내가 외로움을 고독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확신이 있는 의심은 아니다. 다만 내 감정과 생각이 진실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질문을 던진 것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나는 외로움이란 감정을 느꼈던 것은 분명하다. 제주도라는, 외가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내던져진 악몽의 대지에서 겪어야 했던 슬픔은 명백히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 뒤에도 아빠의 잘못된 결정들로 인해 수차례 이사를 반복하면서 겪었던 사건들도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게 했고. 하지만 이런 경험들과 경험으로부터 얻게 된 외로움은 어느 순간부터 점차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통 외로움을 느끼면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 - 혹은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그 무언가에 - 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내향적인 성격과 상황적인 이유, 반복된 상실 등을 통해 오히려 외로움을 객관화시킬 수 있었다. 외로움 속에서 이것을 견디려고 읽었던 책들과 들었던 음악 등이 이 과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고독을 '외로움의 승화'라고 생각한다.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를 함께 보낸 형과 나는 이 양상이 확연히 다르다. 서로 성격이 다른, 형은 극외향적이고 나는 극내향적이라는 차이와 형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차이가 있지만 형은 나보다 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 속에서 있어야만 한다. 제주도에 있을 때 사람이 너무 보고 싶다고 이마트에 가서 물건은 안사도 사람 구경을 하고 올 정도였으니까(물론 형의 말도 들어봐야 한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두컴컴한 길을 걸으며 드문드문 놓여진 가로등을 지나쳤다. 길은 어느새 대로변으로 접어들었고 나는 밤의 어둠을 물리친 빛의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어쩌면 나는 외로움으로 가득했던 과거 속에서 드문드문 놓여진 가로등, 나를 지탱해준 것들을 만나 지금에 이를 수 있지 않았을까. 고독이 최고다! 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사람은 반드시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한다,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며칠 전 아비치의 <Trouble>이란 노래를 처음 듣게 되었다. 평소 좋아하던 뮤지션이었는데 이런 좋은 노래를 왜 지금까지 듣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훌륭한 곡이었다. 지금도 반복해서 듣고 있는 이 노래는 분위기도 그렇지만 가사가 특히 좋다. "Losing myself just to find me again", "I may not be the best, but I'm far from the worst", " I've seen trouble more than any man should bare. But I've seen enough joy, I've had more than my share", "I know that there's a plan that goes way beyond mine. I got to step back just to see the design. The mind fears the heart but the heart doesn't mind"도 마음에 와 닿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가사는 "I may not be perfect, but I'm loving this life"다. 내가 고독하든 그렇지 않든, 과거에 어떠한 상실이 있었고 그로인해 고통스러웠을지라도 - 지금도 고통스럽다해도 - 이 완벽하지 않음을, 완벽하지 않은 삶과 나 자신을 사랑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내가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떻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무엇보다 내가 내 삶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외로움에 대한 짧고도 긴 고찰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밥을 먹고나니 1시 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네 시가 다 되어간다. 흥겨운 아비치의 노래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이 즐거움은 조금 있다 시작될 맨유의 경기로 인해 한층 더 커져간다. 코로나로 중단되었던 프리미어리그가 다시 시작되니 일상의 재미가 하나 추가되어 즐겁다. 물론, 경기에서 이겨야 더 오래 가겠지. 그러니 제발 이겼으면 좋겠다. 힘을 내요 맨유! 맹구는 좀 아니잖아요ㅠㅠ 퍼기 경의 맨유 시절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