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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go Oct 22. 2020

201022

1.

그냥 그런 나날들. 약간 방향 감각을 잃어 버린 것도 같고 - . 그냥 그렇다. 

지난 주부터 웰부트린을 300으로 올려서 라믹탈 150 + 웰부트린 300 이렇게 먹고 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어떤 증상인지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대략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감이 잘 안잡힌다. 

잠은 그럭저럭 자고 있긴한데 전반적인 컨디션은 그다지 좋지 않다. 게다가 한달 전부터 무릎이 너무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는데 이것 때문에 마음이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우울에 우울을 더하는.


2. 

지금은 또 한동안 잠잠하던 머리가 아프다. 어제 저녁부터 조금씩 아프더니 지금은 집중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아파서 타이레놀을 먹었다. 우울한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신체적인 고통이 더해지니 죽을 맛이다. 


3.

이번에도 브런치북 프로젝트는 물 건너 간 것 같다. 작년에 준비하다가 여러 사정이 겹쳐서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번에도...... 목차를 만들고 챕터별로 분류하고 어떤 내용의 글을 넣을 건지 구상을 하고는 있는데 컨디션도 별로고 우울증의 여파로 집중력도 덩달아 떨어지니 어떻게 될런지. 양극성 장애에 대한 책인데 언제나 빛을 보려나. 


4. 

내 우울은 계절을 타는 것 같다. 봄~여름은 무난하거나 경조증 상태로 올라가는 반면에 가을~겨울은 우울증의 시기랄까. 특히 겨울이 다가올수록 우울증은 힘을 얻는 것 같다. 사계절이 아니라 대체로 따듯한 나라에서 살면 좀 괜찮을까.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하다보니 더 힘들지도? 


5.

우울증의 특징 중 하나는 자살 사고다. 특히 양극성 장애 환자들은 더 심한데 어떤 연구에 의하면 3명 중 1명은 평생 1번 이상의 자살시도를 하고 전체 환자들 중에서 15%는 자살에 성공한다.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도 일반 인구에 비해 15배나 높다. 즉 자살은 양극성 장애 환자와 뗄래야 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6.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자살에 대해,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아, 그냥 죽고 싶다 이런게 아니다. 진지하게 자살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자살 계획을 세워봤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그냥 죽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과 느낌과는 차원이 다르다. 거의 매순간 내가 살아야 할 이유, 아니 자살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묻는다. 우울기일 때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지만 보통일 때도 마찬가지다. 마치 그림자처럼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따라다닌다. 


7.

자살은 왜 하면 안되는 걸까. 나는 자살에 대해 딱히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지 방법에 있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인간 최대의 자유는 자살이라고도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삶의 의미가 없다면 굳이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이 준 생명을~ 어쩌고 하면서 반대할테지만 무신론자인 내게는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안락사가 가까운 시일 내에 허용이 되었으면 한다. 


8.

내가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자살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그 이유는 말해주지 않는다. 무조건 반사처럼, 자동응답기의 멘트처럼 나오는 말들. 어차피 인간은 죽는데 어떻게, 언제 죽느냐는 상관이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 내가 태어난 것이 내 의지가 아니라면 적어도 죽는 것 정도는 내 의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9.

재미? 글쎄 잘 모르겠다. 모르는 게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지만, 여튼 그렇다. 그냥 잠깐 낄낄거리는 건 있다. 좀 전에도 유투브 보면서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런 건 그냥 잠깐 스쳐지나가는 거지 진짜 마음 속 깊이 희열을 느끼고 지속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재미의 대상은 없다. 브런치북을 계획하고 얼마 간의 할일을 하고 그런 일련의 활동들은 뭐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에서 하는 게 크다. 물론 브런치북 작업은 나름 진지하게, 또 재미를 가지고 하는 중이다. 그렇지만 이게 삶 자체를 이어나가야 할 원동력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라고 밖에 할 수 없다. 


10.

사랑과 이해는 다른 영역이란 걸 새삼 느낀다. 사랑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해한다고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에 대해 그닥 환상도 없고 욕구도 적은 나에게 그보다는 이해가 더 중요하다. 사랑이라는 것은 일종의 화학작용과 정신적인 교류, 성적인 요소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엄청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쉽게 생기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쉽게 망가지고 깨지는 것도 사랑이다. 하지만 이해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힘을 준다. 사랑은 모호한 감정만으로 충분하지만 이해는 감정 그 이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건 사랑하면서 이해하는 거지만, 글쎄... 그게 가능하긴 어려울 것 같다. 


11.

예전에, 그러니까 조울증 이전에는 이해받는 다는 느낌이 조금 있긴 했다.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대체로 사람들은 내 이야기에 놀라거나 진짜인지 의문을 표하곤 했다. 하지만 어쩌다 한 사람 정도는 내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공감을 해줬다. 그 사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12.

하지만 요즘은 이해라는 단어와 멀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슈만이 편지에 썼듯 내가 겪는 조울증의 세계는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니까. 양극단의 감정을 느끼며 사는 삶, 매일 매순간 자살에 대한 생각과 논쟁해야 하는 삶, 손상된 역할 기능으로 인해 느끼는 좌절감과 자괴감, 조울증으로 인해 겪어야 하는 부작용들. 나는 이따금 일반 인구, 그러니까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정신질환자들이 더 강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사람들은 경험해보지 못하고 상상하기 힘든 상황을 견디며 살아가니까. 그렇지만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그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점을 떠올린다. 게다가 그런 걸 따져서 뭐하겠냐는, 아이고 의미없다 라는 말이 나와서 머리속에서 그런 생각을 치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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