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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go Oct 31. 2020

주고 싶은 마음, 죽고 싶은 마음

  1.

속이 좋지 않아 어제 저녁을 먹지 않았다. 거의 18시간 만에 먹는 식사는 빵이었다. 우유를 따르고 무심코 우유팩에 쓰여진 문구를 봤다. "죽고 싶은 마음"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깜짝 놀라서 다시 보니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2. 

일요일부터 약 1주일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잠드는 건 그럭저럭 괜찮다. 이전에 비해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다. 문제는 2~3시간 밖에 못 잔다는 것이다. 조금 잔 거 같아서 시계를 보면 2시간 남짓 잤고 그래서 더 자려고 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1시간 정도 뒤척이다 겨우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이게 일주일 정도 되니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모르겠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될 정도로 괴로운 시간들. 머리가 띵하고 의욕이 없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3.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주고 싶은 마음을 죽고 싶은 마음이라고 본 것은. 가뜩이나 요즘 우울 증상이 심해져서 웰부트린을 증량했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리 좋지 않은 상황임은 분명하다. 


4. 

불면증은 왜 생겼을까. 사실 불면증은 나와 좀 거리가 있는 증상이다. 지금처럼 얼마 못 자고 깨서 다시 잠들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늘 그랬듯 추리를 해봤다. 지난 일주일을 분석해보고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불면증을 유발할 만한 것인지 따져봤다. 그랬더니 확실하지는 않지만 의심할 수는 있는 요인이 있었다. 


5. 

지난주 토요일, 재활의학과에 갔었다. 허리디스크와 목 디스크 때문에 다녔던 병원인데 이번에는 무릎 때문에 갔다. 진찰 결과 무릎 통증이 무릎의 문제인지 아니면 허리 문제로 무릎이 아픈 것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릎 사진을 찍고 2주간 약을 먹어보기로 했다. 사진상으로 나타나거나 약을 먹고 괜찮아지면 무릎의 문제고, 사진상으로 이상이 없고 약을 먹었는데도 통증이 지속되면 무릎이 아닌 허리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의사 선생님의 진단이었다. 그래서 소염진통제를 처방받았다. 약을 처방받기 전에 라믹탈과 웰부트린을 복용중이라고 말했고 - 정신과가 아닌 타과 진료 때는 항상 잊지 않고 말한다. 약물 상호작용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지만 약하게 할지 보통대로 할지 물으시길래 괜찮으면 보통으로 가자고(!) 했다. 


6. 

소염진통제의 경우 간에 부담을 주는 경우가 많아서 술을 먹을 경우 치명적인 손상이 발생한다. 내가 먹게 된 약도 예외는 아니라서 위장 출혈, 간손상 등의 위험이 있으니 술을 정기적으로 마시는 사람은 투약하지 말거나 주의해서 사용하라고 의약품 정보에 써 있었다. 


7. 

술을 먹지 말것. 이것은 매일 맥주 한 캔씩 먹는 걸 삶의 낙으로 삼고 있는 내게 치명적인(?) 권고였다. 처방받고 온 날 저녁부터 먹어야 할 약을 먹지 않고 마지막 맥주를 마셨다. 2주 뒤, 어쩌면 그보다 더 뒤에나 먹을 수 있는 맥주를 애틋한 마음으로 마셨다. 늘 그랬듯 맛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8. 

그래서 일요일 아침부터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약 먹기 전 특이 사항이 하나 있었다. 금요일에는 내분비내과를, 토요일에는 재활의학과에 갔는데 둘 다 오전 진료라 오랜만에 일찍 일어났었다. 원래 5~7시 사이에 자던 사람이 2~3시에 자려고 하니 잠이 올리가 있나. 이틀간 제대로 못자고 좀비처럼 다녔다. 그리고 원래대로 살았던 일요일에는 이전처럼 잘 잤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의 일탈(?)은 불면증의 원인으로 보기엔 어려웠다. 


9.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절묘하게도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일요일부터 불면증이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일요일 아침, 저녁에 먹고나서 월요일부터 증상이 시작되었다. 일주일간 크게 변동이 있었던 것은 없었기 때문에 재활의학과에서 처방 받은 약을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세 알 중에 하나는 위장약이므로 불면증과의 관련성이 없어보였기 때문에 남은 두 알에 대해서 조사해봤다.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의약품 정보 찾는 게 일상이 되었기에 의약품안전나라에 들어가서 검색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각종 부작용들을 보면서 관련성을 검토하다가 두 약 모두 불면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딱히 다른 원인이 없고 약을 먹은 다음부터 불면증이 생겼으며 심지어 그 약의 부작용 중에 불면증이 있으니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일단 어제 저녁부터 약을 중단했다. 어제 아침까지는 먹었기 때문에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약물의 효과(?)가 남아 있을 수 있으므로 내일이나 내일 모레부터 제대로 된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 때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까.......


뜬금없지만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최근 고문의 트렌드가 수면 박탈이라는 것에 그것 참 효과적이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심찮게 CIA나 미군의 시설에서 인권 침해, 정확히는 고문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고 이런 점을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전통적인 방식이 효율적이지 않아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문 방식이 수면 박탈과 자백제 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상자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성능이 좋은 스피커를 양쪽에 놓은 뒤에 시끄러운 음악이나 굉음을 틀어 놓는다. 그리고 중간 중간 화초에 물 주듯 물도 뿌려주면 금상첨화. 빈 라덴 사살작전을 다룬 영화에서 이 고문법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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