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Hubris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go Dec 31. 2020

종교의 미래

이루어질 수 없는 화해

코로나 사태로 1년 동안 전 세계가 홍역을 치뤘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불안과 희망이 뒤섞인 예측들이 되풀이 될 뿐, 그 누구도 언제 이 혼란이 종식될 지 알 수 없다. 그저 지금 이 시기가 지나가길 바라며 묵묵히 견디는 수밖에는 없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를 비롯해 종교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다. 특히 개신교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개독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최악이다. 게다가 올 한해 전광훈 목사를 비롯한 여러 교회들이 코로나 수칙을 어기고 바이러스 전파자 역할을 톡톡히 함으로써 그런 이미지는 더욱 굳어졌다. 그래서 일부 개신교인들은 주변에 교회 다닌다는 말을 하는 것이 두렵다는 말을 할 정도다. 


브런치에 공공연히 썼듯, 나는 무신론자다. 목회자 자녀로 태어났기에 모태신앙이라는 이상한 타이틀을 획득한 채로 살았고 20년 넘게 교회에서 살았다. 어릴 때부터 엄격한 종교 교육을 받았고 그에 맞게 교회적인 인간으로 살았었다. 중간에 방황했던 적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회는 계속 다녔고 20대 초에는 그런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교회에 전적으로 헌신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과거가 되었다. 


앞으로 내가 계속 무신론자로 남을지 아니면 다시 유신론자가 될지는 모른다. 다만 현재,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신론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마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사제에게 "그렇지만 내게는 확신이라는 게 있다. 나 자신에 대한 것,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당신보다 더한 확신. 내 인생과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 이 대목은 정말 읽을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내 마음을 너무나도 정확히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꽤나 자신만만한 태도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신의 신념이란 것은 모두 여자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가치도 없다. 당신은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도 없다"는 말은 지금까지 내게 종교를 강요해왔던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엄격히 말해서 무교와 무신론자는 다르다. 무종교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 불가지론적인 의미가 담겨있지만 무신론자는 종교 그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고 비판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현재의 나는 신에 대한 믿음도 종교에 대한 확신도 없다. 




무신론자가 되고 나서 얼마 동안은 종교에 대한 반발과 거부감을 강하게 표출했었다. 그리고 도대체 종교인들은 왜 그 말도 안되는 소리를 당연하다는 듯 믿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자연스럽게 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논쟁을 해서라도 그들의 잘못된 사고를 뜯어 고치고 싶었다. 하지만 요즘은 종교가 어떻든, 종교인들이 어떻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며 범법 행위를 할때는 가차없이 비판의 칼을 꺼내곤 한다. 


이렇게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를 떠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종교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종교 자체의 진리 여부를 떠나 왜 인간이 종교에 탐닉하는지, 종교는 어떻게해서 유지 되는지 알고 싶었다. 나 또한 한때는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신의 존재 여부를 따지고 그것의 부재를 증명하기보다는 신에 대한 믿음과 종교의 신념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꾸준히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나는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화해나 타협,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종교의 사망을 예견했고 일부분 그 말이 맞는 듯 보였지만 지금까지 종교는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계속 명맥을 이어갈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종교적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인간에게 종교적 본능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몇 년 전부터다. 역사와 신화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서적을 읽다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 메이저라고 할 수 있는 종교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에 유력하게 여겨졌던 종교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과 함께 애니미즘이라는 단어가 결합하자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냈고 그 이유는 모종의 유익 때문이 아닐까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 유익에는 공동체의 결속,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해답, 지배와 통제의 용이함 등 여러가지가 있을 거라는 예측과 함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인문학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다. 과학이 신의 부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를 의심한 게 아니라 내게 더 익숙한 도구가 인문학이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뇌의 진화, 신의 출현>이라는 책이 보다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다. 


양극성 장애를 앓게 되면서 뇌에 대해 이전보다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공이 심리학이기 때문에 원래도 관심의 영역이었지만 개인적인 체험이 더해지자 그 정도가 더 강해진 것이다. 그리고 무신론자가 되면서 종교에 대해, 신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난 상황에서 <뇌의 진화, 신의 출현>이라는 제목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사람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래서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정신의학 박사로 정신질환과 뇌 연구의 권위자다. 그는 단순히 무신론 옹호나 유신론 비판을 위해서 이 책을 쓴 게 아니다. "소년 시절부터 나는 하느님을 찾아 헤맸다"는 저자는 "정신과 의사로서 (...) 신이 뇌의 어디에 거주하는지 알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진행된 뇌 연구를 기초로 다양한 분야의 연구 결과를 결합해 <인간의 뇌가 진화를 거듭하면서 획득한 여러 인지적 기능들이 신과 종교를 만들어냈다>는 결론을 내린다. 과학을 기반으로 했지만 책의 이곳저곳에서 당시의 인류학적인 배경이 등장하기 때문에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책에 대한 서평은 나중에 따로 쓰기로 하고 인상 깊었던 부분을 조금 공유하자면,


신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관념 또한 흔히 차용된다. 일례로 유대-기독교의 인류 창조, 대홍수, 바벨탑 개념은 메소포타미아 종교에서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587년부터 시작된 바빌론 유수 시대에 이스라엘인들이 조로아스터교와 그 전능한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접하게 된 것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 이스라엘인들이 유대로 귀환한 뒤, 처음으로 전능한 유일신이라는 개념이 구약성서에서 두드러지게 되었다. "인간이 큰 도덕적 타락의 위험에 처하여 마침내 악의 세력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세상의 역사에 간격을 두고" 개입하는 "사오시안트", 즉 구세주와 같은 여타 개념들도 조로아스터교에서 차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중 마지막 구세주는 "모든 사람의 선행을 그의 악행과 견주어 가늠할" 심판의 날을 예고할 것이라고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세 명의 구세주가 이 종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의 씨를 받아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고도 가르친다.


로빈 던바는 "종교라는 현상은 우리 인류가 질적인 의미에서 진짜로 우리 유인원 사촌과 다른 점"이라고 지적하며 이렇게 질문한 바 있다. "왜 동물계에서 유일하게 우리 생물종만이 종교에 이처럼 강하게 얽매여 있을까?" 그 답은 우리가 영리하고 자기를 인식하고 남에게 공감하고 자기를 성찰할 뿐만 아니라, 자전적 기억을 지닌 덕분에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스스로를 자신의 과거와 통합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캐런 암스트롱의 말을 빌리면, '종교적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죽음의 딜레마는 사람의 뇌 진화의 필연적인 결과지만, 신과 종교는 우리가 타고난 이 끝없는 딜레마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신과 종교는 인간을-반은 필멸이고 반은 불멸인-혼종으로 만들었다. 어니스트 배커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책인 <죽음의 부정>에서 인간을 "항문을 가진 신"이라고 일컬으며 이러한 모순을 포착했다. "인간은 말 그대로 둘로 쪼개진다. 그는 나머지 자연으로부터 위풍당당하게 우뚝 치솟은 자기 자신의 찬란한 독특성을 인식하지만, 결국에는 땅속 몇 피트 밑으로 돌아가 앞 못 보고 말 못하는 채로 썩어서 영영 사라진다. 이것은 인간이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할 무서운 딜레마다."


책에서는 인간이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뇌 또한 그에 걸맞는 진화를 겪었을 뿐만 아니라 '신'의 개념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어떤 인지적 능력이 수반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특히 마음이론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마음이론의 초기 단계는 일부 동물에서도 가능하지만 보다 고차원적인 차원의 마음이론은 오직 인간만 가능하며 마음이론이 나타나는 뇌 영역과 관련된 신경세포 또한 인간에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사실에서는 짜릿함마저 느꼈다. 내 추측이 맞았다는 사실에 더해 내가 생각하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던 부분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E. 풀러 토리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연구자, 학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멍하니 뒷표지만 보고 있다가 문득, '이래도 안 믿을 사람은 여전히 안 믿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서야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진실을 믿는 게 아니라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이 생각보다 그리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며 처음 받아들인 정보를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강한 것도 그렇다. 나 또한 태어나서부터 종교를 주입 받았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무슨 나쁜 일이 생기면 신의 처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들고 어릴 때부터 들었던 찬송가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를 비롯한 절대 다수의 종교에서는 종교 교육에 목숨을 건다. 어릴 때 세뇌시켜 놓으면 커서도 그것이 유지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같은 맥락에서 나는 종교 교육을 반대한다. 최소한 14세 이후, 혹은 전두엽의 기능이 거의 완성되는 20대 초반까지는 종교 교육을 해서는 안되며 설령 하더라도 다양한 종교를 균형적으로 가르쳐 스스로 선택하도록 해야한다는 입장이다).


과학이 발전하고 이성의 시대인 것처럼 보이는 요즘, 그와 비례해서 불안도 덩달아 커졌다. 실제로 사회가 흉흉해진 건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빠르게 소식을 접하기 때문에 그런 불안이 커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안전한 지금 - 걸핍하면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나 무법에 가까웠던 시기가 많았던 과거에 비해 - 역설적으로 공포와 불안은 더 커졌고 인간은 이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고 그 중에 하나가 종교일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여전히 종교가 '흥행'하고 있고 전세계적으로 신흥종교가 지속적으로 '창조'되고 있다. 


게다가 종교나 사상의 특성상 박해 받는 순교자 포지션일 때 오히려 결집력이 강해지고 이념의 순수성 또한 짙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근본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사회적 혼란이 폭발하게 된다. 동성애에 대한 종교계의 반대만 하더라도 이것이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를 무시하는 일인데 그들은 별 이상한 논리를 들이대며 '반대할 수 없는 - 해서도 안되는 -  것을 반대'하고 있지 않는가. 이처럼 현재에도 미래에도 종교로 인한 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과거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이 등장할 수도 있다. 


얼마 전에 읽은 밀의 <자유론>에서는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공존해야 하며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회나 개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경우에는 비록 그것이 주류의 생각과 어긋난다 하더라도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종교와 교육에 대한 밀의 견해도 나오는데 내게는 다른 부분보다 여기가 더 인상깊었다. 이 책과 <자유론>을 다시 읽고 두 책을 함께 다뤄보는 글을 써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새해다. 기대하지는 않지만 새해에는 보다 갈등이 적은, 설령 있다하더라도 건설적인 갈등만 있길 바라며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책을 읽고나서 진화론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진성 문돌이인 내게 아직 과학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지만 그래도 생물 쪽은 그나마 괜찮을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