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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go Apr 23. 2022

내가 당신을 포기한 이유

관계를 끝내야 할 때 

사회에서 만나든 어디서 만나든 '누군가'와의 '관계'를 끝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단순한 접촉이 아닌, 삶과 삶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관계는 소중하며 특히 태어나면서부터 맺게 되는 '가족'이라는 관계는 무엇보다 특별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중요한 관계 중 하나인 '아빠'라는 사람을 포기했다. 




부모님이 이혼한 지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른 이혼 가정이 어떤 삶을 보내는 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엄마는 그 어떤 때보다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단지 한 사람이 없을 뿐인데 말이다.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객관이라는 건 추구해야 할 목표일 뿐, 달성 가능한 과업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아빠라는 사람이 과연 '좋은' 사람, 남편, 아빠였냐는 질문은 곤혹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명확하게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좋은 사람'이라는 질문에 답을 해볼까 한다.

그가 왜 좋은 사람이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기준을 정해야 한다. 내가 생각할 때 좋은 사람은 인격적인 사람이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 있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관계를 위해서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을 말한다. 관계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이것이 기브 앤 테이크라는 건 아니다. 다만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서로 노력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결단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의 언어는 강압적이었고 지시적이었으며 폭력적이었다. 자신의 헛된 야망 때문에 열 번이 넘는 이사를 하면서 수차례 전학을 다니고 경제적,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에게 위로 한 마디 한 적 없었다(도시에서 나름 여유롭게 살다가 제주도로, 그리고 궁벽한 산골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왕따와 학교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다). 오히려 자신이 안 되는 것, 자신이 목사가 되지 못하고 선교사가 되지 못한 이유는 다 도와주지 않는 엄마와 우리들 때문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정작 일을 망친 건, 좋은 기회가 있을 때 발로 차고 도움을 줄 사람과 다퉜으며 건강과 자산 관리를 하지 않은 당신 탓이었음에도 그랬다. 자신을 위해 다른 가족들의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니, 그에게 가족은 없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가족을 생각했더라면, 파산 당하기 전에 우리들만 남겨놓고 자신은 쏙 도망가서 기도원을 전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연하게 빨간 딱지를 붙이러오면 그 자리에서 협상을 하면 된다고, 돈 백만원 정도만 있으면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가족은 무슨 의미였을까. 그 때 우린 20만원 남짓한 월세도 내기 힘들었는데 말이다. 


'좋은 남편'이라는 부분에서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아니 그에겐 남편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이 안되면 무조건 아내 탓을 하고 장애인이라는 걸 알면서 결혼한 사람이 보통 사람도 하기 힘든 농사일을 하게 했다. 조금만 성질을 건드리거나 추진하는 일, 벌리는 사업 - 대부분이 합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다단계였다. 파산과 기타 여러 문제들의 근원도 다단계였고 - 에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 혹은 반대를 하면 '이혼'하고 나가라는 말을 일삼았던 사람. 차가 쌩쌩달리는 서울 한 복판에서 사소한 의견 충돌 끝에 엄마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소리쳤던 사건이 아직도 기억난다. 친가 사람들에게 엄마 탓을 하며 말도 안되는 거짓말과 모함으로 사이를 이간질 시킨 것도, 무엇보다 결혼하고 나서 제대로 된 생활비를 단 한번도 주지 않은 것도 그에게 남편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하다는 증거다. 


그리고 남편과 마찬가지로 '아빠'라는 단어도 그에겐 알맞지 않았다. 

서너 살 때부터 걸핍하면 언어적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가하고 불투명한 미래, 뻔히 파국이 예상되는 방향으로 가족을 이끌고 들어가 고통스럽게 한 사람이 과연 아빠일까. 나는 아직도 그 때 그 순간의 느낌을 기억한다. 집에서 아빠를 만났을 때 얼굴을 살피고 기분 상태를 파악한 후 잠들기 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긴장했던 순간들.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해서 '폭력'으로 변하는, 그에겐 놀이였을지 아니면 화풀이였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 장난이 폭력이 될지,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혼나거나 맞지 않을지 생각하며 장이 뒤틀리는 공포를 느껴야 했던 나날들. 어쩌다 아빠와 단 둘이 있게 되면 머리속이 하얗게 변하거나 손과 발에 땀이 났다. 어릴 때 아빠랑 같이 밥먹고 나면 속이 불편하다 못해 습관적으로 체했다. 7살 때 혼자서 손을 따는 법을 익혔을 정도로 자주 그랬다.


또한 그는 나와 형에게 제대로 된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제대로 급식비 등을 내지 못해 교무실에 불려가는 일이 많았다. 다행히 고등학교 때는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지원을 받아서 그런 일이 적었지만, 그 일들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남아있다. 대학 등록금도 전부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다. 알바를 서너 개 하면서 좋은 성적을 유지할 때도 그는 다른 집 자식을 운운했다(나는 아직도 종종 후회한다. 그가 그런 말을 했을 때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그런 말을 하냐'고 하지 못한 것을 말이다). 우리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죄다 엄마가 교육을 제대로 안 시켜서 그렇다는 말을 하는 사람. 자녀 교육을 부모 둘이서 하는 거라고 한다면 그는 아빠라고 할 수 없다. 


그가 내게 남겨준 건 트라우마와 끝이 보이지 않은 고통이다. 그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했던 기억 때문에 탈 수 없게 된 차. 택시만 타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속이 울렁거리면서 불안함을 느낀다. 특히 그 사건이 일어났던 조수석에 앉으면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 든다. 내가 마음 편히 탈 수 있는 건 대중교통 뿐이다.

 

또한 견딜 수 없는 폭력 속에서도 생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의 비위를 맞춰야 했던 기억은 깊은 수치심과 무력감을 남겼다. 무엇보다 슬픈 일은 내가 강박적으로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다른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게 그들이 애정의 표시로 껴안으려고 하거나 내 몸을 건드리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고 극도의 짜증과 분노가 치솟는다.  옆에 서 있는 것도 편안하지 않다.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는 있지만 스킨십은 불가능하다. 


신체적인 학대가 나쁜 이유는 단지 직접적인, 눈에 보이는 피해를 남기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의 신체를 어린 시절부터 '침범'당하는 사람은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신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고 몸에 남는 상처 이상으로 더 깊고 치명적인 정신의 상처를 남긴다. 인간에게 몸은 정신을 담는 그릇인데, 그게 상처를 입으면 내용물이 멀쩡하지 않은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가족이 '유지'되고 '행복'하길 바랬다. 그래서 나와 우리 가족을 치유하고 싶어서 심리학과를 선택했고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에게도 불행한 과거가 있었음을 알고 나서 갖게된 연민이 언젠가는 변할 거라는 희망과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될 것이라는 망상을 키웠다. 특히 개신교인이었던 그때는 용서해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도 더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피폐해졌다. 내가 더 절망스러웠던 건, 조울증이 발병되었음에도 그에겐 아무런 태도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는 나에 대해, 나의 고통과 조울증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으며 상태를 악화시키는 일만 반복했다. 내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거나 이상한 일들 - 사업 등 여러 부분에서 - 을 벌이고 나를 부끄럽게 여겼다. 나를 어떻게든 회복시키려고 애를 쓰던 엄마와는 정반대였다.(심지어 그는 내가 조울증에 걸린 게 엄마 때문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자신을 정신병원에 집어넣지 못하니까 멀쩡한 아들을 넣는 거라나. 근데 실은 당신 때문에 걸린 건데...?*)


그럼에도 내가 그를 완벽히 포기하게 된 순간은 빨리 찾아오지 않았다. 반쯤은 포기했어도 가족이 뭐라고, 파국을 예상하면서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마음을 정리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정말 황당하게도, 그리고 경악스럽게도 가족들에게는 폭력의 대명사였던 그는 교회에서 신임받고 칭찬 받는 '일꾼'이었다. 자기 자녀들은 학대했으면서 주일학교 교사를 몇 년째 했고 할때마다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매우 좋아했다. 무슨 의도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런 사실들을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볼때 역겹고 화가 났지만 그래도 꾹 참고 있었다(사춘기 자녀 문제로 고민하는 이혼한 싱글맘을 상담해준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그가 자신이 맡은 초등학생들에게 초밥을 먹이고 영화관을 데려가고 놀아주는데 10만원이 넘는 돈을 썼다며 투정을 부리듯 말하기 전까지는.


아니, 뭐 애들한테 그렇게 해줄 수도 있지 라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배경을 살펴보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그 아이들은 매우 잘사는 집 자녀들이다. 굳이 그가 그렇게 해주지 않아도 되는 아이들이었고 그의 행동은 평균적인 교사들의 행동보다 과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그런 말을 했을 때 나는 내 치료비로 막대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가 내게 치료 비용이 많이 든다며 불평했던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당시에 한 번 병원가면 진료비와 약값을 합하면 월 5~7만원이 들었다). 수입도 일정치 않은데다 가뜩이나 돈이 없는 상황에서 10만원이 넘는 돈을 엄연한 '남'에게 썼다는 것에서 1차 분노가 올라왔다. 그리고 자기 자녀들은 때리고 장난친다고 괴롭히고 그것도 나중에는 온갖 고된 상황에만 빠뜨렸던 사람이 남의 자식은 애지중지한다는 것에 2차 분노와 배신감이 솟았다. 


나는 그때 생각과 마음을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에게 가족은 아무것도 아니다." 30년간 지지부진하게 끌고 왔던 나와 그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사건이었다. 더불어 내 안에서 무엇인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나를 연결하고 있던 '가족'이라는 끈이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지금까지 고민했던, 변화에 대한 가능성과 그의 과거에 대한 연민이 단숨에 정리되었다. 나는 내게 잘못을 저지른 그에게 불행한 과거가 있다는 이유로 미워하지도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못하는 양가감정 사이에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가족을 위해 중재자의 역할을 떠맡기도 했다. 그러다 이 사건이 있기 얼마 전부터 "그가 어떠한 경험을 했든 간에 그것을 이유로 타인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용납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마침내 이 일을 계기로 고민을 끝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변화가 그 순간만으로 가능했던 건 아니다. 이것은 장기간 받았던 상담줄스 에번스의 <삶을 사랑하는 기술>을 읽고 나서야 가능했다. 인지치료와 상담을 포함해 약 200회에 가까운 만남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내면에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상담을 통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고 그보다 더 노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모든 문제는 내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그에 대한 미련과 단절에 대한 죄책감을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우리 삶에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 때문에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건 의미없는 일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구실로 자신의 생각 행동 삶에서 행한 중요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라는 책의 구절을 읽고나서 아빠와 엄마의 문제는 그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또한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어떤 경험을 했든 그게 나에게 잘못한 일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이혼을 꺼려했던 태도도 바뀌었다. 그에 대한 연민이 사라지자 현재의 상황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내 치료와 가족을 위해서는 이혼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기하게도 이 사건 이후에 아빠가 엄마에게 처음으로 폭력을 행사했고(믿기지 않겠지만 그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엄마에게 폭력을 가한 적이 없다. 보통 모두에게 그런 경우가 많다), 이를 계기로 이혼을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미리 마음을 정리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덕분에 이혼 결정에 대해 주저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엄마를 설득하고 보살필 수 있었다. 


재판 기간 중에 그는 내게 억울하다고 문자했다. 가뜩이나 이혼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조울증 증상이 심해지려는 상황이었기에 바로 그의 전화를 차단했다. 신고 후 격리 조치로 집에서 나가야 했을 때 이후로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다. 그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정말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자기에겐 장난처럼 한 일이고 별 거 아닌데 왜 갑자기 난리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작 당신과 헤어지지 않은 게 억울하다고. 


이혼 과정도, 그리고 그 이후의 삶도 상당히 만족스럽지만 딱 한 가지가 내 발목을 잡고 있다. 그것은 부부와 달리 자녀는 법적으로 남남이 안된다는 것이다. 가능한 그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싶은 내게 이런 법적인 문제는 족쇄이자 발톱에 박힌 가시같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추후에 재산이나 조울증 치료 때문에 그가 내 삶에 끼어드는 일이 없길 바라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나의 태도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다는 사실은 잘 안다. 실제로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말을 이따금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한국의 정서가 개인에게 매우 해롭다고 생각한다. 가족치료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버지니아 새티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의 감정적인 규칙이 대부분 파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화를 내서는 안 돼’와 같은 규칙 말이다.
이런 비인간적인 규칙을 지키기란 불가능하니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


가족이라고해서 모든 게 용납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 특히 가족에 대한 잘못된 '신화'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 무엇보다 무조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세라 톰리는 <프로이트라면 어떻게 할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밀러(정신분석학자 앨리스 밀러)는 치료를 통해 사람들이 기억을 밝혀내고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재발견했는데, 이 감정은 겉으로 보기에 행복한 가정이 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꼭꼭 숨겨둔 것이었다. 밀러는 우리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부모가 실제로 공경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밀러는 그런 생각이 아이를 망가뜨릴 수 있으며,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하도 무시한 나머지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평생토록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설명한다."


여담이지만, 엄마와 함께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고 신고를 위해 경찰서까지 동행했었다. 경찰의 출석요구에 그는 장난이었다며 넘기려고 했지만 경찰이 "당신은 장난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당사자에게 장난이 아니라면 장난이 아니다. 당장 출석해라"고 했다. 아빠는 경찰 입회하에 엄마를 만난 자리에서 무마하려는 말을 하면서 "이제 앞으로 우리 각자 자유롭게 살자"라는 발언을 했고 거기서 엄마가 대폭발했다. 지금까지 당신은 자유롭게 살았으면서 무슨 소리냐고. 프로이트식 실언으로치면 그에게 아마 가족은 족쇄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정작 그 족쇄를 만든 게 자신이었고 - 엄마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아빠의 우격다짐으로 결혼을 하게 됐다 - 한 번도 가족에 붙잡혔던 적이 없었다는 게 아이러니다. 자기 마음대로 집에 왔다가 나갔다가 어디서 뭘 하는지도 잘 알려주지도 않는 사람이 자유롭지 않으면 누가 자유로울까. 어릴 때 와이셔츠에 립스틱 자국을 묻혀왔던 그는 이성 문제로부터도 자유로웠고(?) 결정적인 외도 사실은 없었으나(모르지만) 여자 목사가 운영하는 기도원을 주로 간다든지, 버젓이 아내가 있음에도 다른 이성과 친근한 모습을 보이고 그걸 또 사진을 찍어서 집에 걸어놓는 등 정말 자유남편이었다. 


아, 그에게 고마운 일이 있다. 그 덕분에 결혼과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고, 사랑이란 신화의 진실을 알게 됐다. 내가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필연이었으나 당신 덕분에 더 빠르고 확고해졌다는 걸 그는 알고 있을까. 무신론자 선언과 이혼을 지지한 것이 내게 매우 중요한 사건인만큼 이건 고맙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그동안 만나서 괴로웠고 이제 다시 보지 말아요 우리. 

당신 말마따나 각자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자구요."




+* 조울증 발병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고 생물학적인 원인이 더 크다고 보지만 환경 또한 큰 영향을 미친다. 이것에 대해 <양극성 장애 : 조울병의 이해와 치료>(대한우울조울병학회)에서는 "특히 정신사회적 스트레스는 호르몬이나 유전자 발현에 변화를 초래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생물학적 원인과 연관 짓는 연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어린 시절의 학대는 정신질환의 높은 평생유병률, 조기 발병, 빠른 순환과 연관이 있다. 즉 어린 시절의 학대는 양극성장애 발현과 경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황당했던 일을 추가하자면, 교회 사람들은 아빠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평가와 행동은 별개라는 걸 뼈져리게 깨달았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건 당신에게만 해당되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 그 인간은 주변에 엄마에 대해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폭행이 모함이라든지, 자기는 장애인이라 '불쌍해서' 데리고 살려고 했는데 엄마가 이혼하자고 한다든지. 실제로는 자기가 이혼하자고 전부터 그랬고 데리고 살아주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엄마였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의 태도는 굉장히 실망스럽고 역겨웠다(특히 엄마네 교회. 엄마와 아빠는 같은 개신교인임에도 각각 다른 교회를 다녔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유능한 엄마에게 깊은 열등감을 갖고 있던 그 사람 때문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엄마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등의 태도를 견디지 못한 엄마도 다른 교회를 다니는 걸 택했다). 원래 그런 인간들인 줄은 알고 있었고 종교 특성상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피해자는 보이지 않고 '용서'하라느니 참고 인내하고 기도하면 그 잘난 '신'님께서 변화시켜주실 거라느니 기도 안해서 그렇다느니 성경적이지 않다 뭐다,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종교만 보이는 그들이 인간이기는 한지 의심스러웠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라는 부분만 강조하지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아끼라고 한 말과 자녀를 노하지 않게 하라는 부분을 무시하는데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뭐, 덕분에 어울리지도 않는 개신교인으로 살던 엄마에게 원래 믿었던 천주교로 돌아가는 계기가 된 건 긍정적인 일이지만. 인생사 새옹지마가 딱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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