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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ubris

대화 - 1

괴로움

by Argo

-뭐가 가장 괴로워?

-너무 많은데?


-그래도 단 하나만 골라봐

-신뢰의 부재?


-...?

-그냥... 뭐랄까. 쉽게 말하면 딱 하나 변한 거거든? 내가 조울증 환자가 된 거. 근데 그게 그냥 다 바꿔버렸어. 가장 괴로운 게 뭐냐고 물었지? 내가 내가 아니라는 거.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인데, 조울증 이전과 이후로 '나'라는 존재는, 아니지 일단 표면적으로는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 된 거랄까.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음... 쉽게 말해서 니가 지금 쓰고 있는 아이폰을 봐. 아이폰이라는 이름은 같지. 근데 지금 쓰고 있는 건 13이고 이전에 쓰던 건 7인 것처럼, '나'라는 사람의 이름은 변한 게 없는데 그 안에서 명백한 분리가 일어난 거야. 같지만 다른. 조울증 환자가 아니었던 나와 조울증 환자인 나. 인간에게는 두 개의 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해. 외면적인 연속성과 내면적인 연속성. 외면적인 연속성, 그러니까 이름 같은 거 말이야 그건 죽을 때까지 거의 유지 돼. 불변이라고 볼 수 있지. 하지만 내면적인 연속성은 달라. 유지될 수도 있지만 대게 변화하기 마련이야. 인간이 어떻게 태어났을 때 가졌던 성격이나 환경 그런게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겠어. 크든 작든 변한다고.


-맞아. 그건 그래.

-하지만 이런 변화는 이전과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게 보통이야. 궤도를 조금씩 수정하면서 나아갈 방향을 수정하는 거랑 비슷해. 보통 사람들은 이런 연속성 위에 살고 있어. 과거를 생각했을 때 지나온 발자국을 보며 어떤 것이 유지되고 있고 어떤 것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고. 그리고 이런 것들은 스스로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 있어. 선택의 결과든 어떻든 간에 이런 사건들이 내게 일어났고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혹은 인과 관계 같은 걸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나 설명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거지.


-인생 곡선을 그렸을 때 어떻게든 선이 이어지는 것처럼?

-그렇지. 어떤 변화가 있든간에 내 삶, 내 인생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어. 그게 보통 사람들의 내면적인 연속성이야. 정체성이라고 할수도 있지. 근데 나는 그게 아니야. 조울증이 생긴 건 내 잘못도 아니고 그냥 자연재해처럼 '당한' 거라고. 갑자기 내 삶에 끼어든 운석이랄까. 문제는 이게 내 연속성을 망가뜨렸다는 거지. 인생 곡선을 그리면 조울증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선이야. 특히 조증 삽화부터 시작해서 증상과 부작용으로 정신 없었던 약 5년 동안의 시간들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붕 떠버린 시간처럼 느껴져. 완전히 다른 퍼즐을 갔다가 억지로 끼워맞춘 느낌이야.


-확실히 조울증이 그런 면이 있어. 조증 삽화나 우울 삽화가 평범한 건 아니잖아. 특히 조증 삽화. 평소에 널 잘 알던 사람들은 많이 놀랐을 걸? 이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들이 많이 튀어나왔으니까. 한 두개면 그러려니 할텐데 거의 모든 면에서 변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조증 삽화 때는 '그래야만' 했어.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상한 것 투성이었던 행동들이 그 당시에는 나름이 논리가 있었다고.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래야하는 이유가 있었던 거야. 물론 나 스스로도 이게 이전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는 있었어. 그럼에도 마치 자석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변화에 끌려가게 됐어.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이런 상황인 거지. 처음에는 컨트롤할 수 있었던 기관차가 어떻게 하다보니 폭주하게 됐는데 그 상태가 되면 잘못된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잖아. 멈추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고.


-사고?

-응. 아무리 큰 산불도 태울 게 없으면 꺼지는 것처럼 폭주기관차도 엔진이 터지든 어디에 박든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어야 해. 내가 조증 삽화의 끝에서 우울 삽화로 추락한 것도 같은 맥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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