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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go Sep 12. 2022

인생 따위 엿이나 드세요

이것은 책 제목이면서 또 아니기도 하다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도서관에서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때의 내가 행복했는지 아니면 불행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피식 웃으면서 마음 깊이 담아 두었다는 게 기억이 난다.

너무나도 마음에 든 제목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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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책을 세 번 정도 읽었을 것이다.

상당히 시니컬한 내용으로 가득찬 이 책은 내 취향을 사정없이 저격했다.

마지막에 읽었을 때가 조울증으로 한참 시달릴 때였기에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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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나? 그런게 있기나 한가.

심리학과 나와놓고 이런 말하는 게 좀 웃기긴 한다.

자아니 자기니 하는 것들.

융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가 '자기'라는 개념이었고 '자아'가 '자기'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경이로웠기 때문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헤르만 헤세를 좋아했던 거고.

(헤르만 헤세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융에게 장기간 분석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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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원 들여서 에니어그램 강의를 들었던 적이 있다.

나란조의 직계 제자 셋이 와서 이론적(?) 강의와 수행 과정을 9박 10일 정도 했었다. 

여타 흥행하는 이론들이 그렇듯 에니어그램도 본래의 나 혹은 진짜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각자의 유형이 정해져 있고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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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넘게 지루한 싸움을 이어가면서 드는 생각은 "진짜로, 진짜로, 인생 따위 엿이나 드세요."

이제와서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 싶지 않다.

정확히는 그럴만한 힘도 없다.

증오나 원망에도 에너지가 들어가는데 난 그 에너지로 하루 살기 바쁘다.

물론 없다고는 안했다.

깊은 곳에 잘 간직하고 있다.

증오, 분노, 원망은 표출할 때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고 삶의 추진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간직하고 있을 때는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내가 삶에 대해, 조울증에 대해, 어떤 인간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증오와 분노를 '완전히' 표출하거나 '용서'같은 행위로 놓아버리는 순간 나라는 존재와 나의 인생은 파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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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난 긍정이란 단어를 싫어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인간의 기억이란, 감정이란, 그리고 기억 속의 감정이란 항상 최신의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법이니까.

심지어 과거에 대한 사실과 감정은 뇌가 생존을 위해(또는 필요에 의해서) 수정하기도 하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내 과거를 돌이켜 보면 긍정보다 부정이 많았고 기쁨보다 고통과 절망, 슬픔이 가득했다. 

어렸을 때도 그렇고 외가에서 납치당하다시피 제주도로 끌려갔던 10살, 진정한 지옥의 시작이었던 그때 이후도 마찬가지다. 

다만 외가에서 살때는 그나마 행복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인생의 총량을 따져본다면 긍정이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아빠라는 인간이 변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텼으나 결국 이혼으로 종결해야 했던 시간을 통해 '긍정'이란 단지 희망의 변주에 불과하며, 그 희망이라는 것도 미래를 담보로 하는 기만이라는 걸 깨달았다.

에릭 호퍼가 옳았다.

인간에게는 희망보다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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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 내가 고장났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조울증 때문은 아니다. 

조울증이 한 몫을 하는 건 분명하지만 더 광의의 의미에서, 인생과 '나'라는 실존적 존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뒤틀려졌고 또 망가져있다는 걸 느꼈다.

퍼즐을 열심히 맞추다가 거의 완성할 즈음에서야 가장 중요한 부분의 퍼즐 조각들이 없다는 걸 깨달은 아이처럼, 도무지 해결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난제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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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버겁다.

어찌 저찌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도 얼마나 내가 나를 감당해낼지 모르겠다.

반쯤은 의식적으로 '의식'을 죽이면서 살고 있다.

명확한 의식으로는 하루도 견디기 힘드니까.

로맹 가리의 <여자의 빛>에 나오는 그 남자처럼 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 혹은 보를레르의 시처럼 취해 있는 상태가 유일하게 현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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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는 국가나 종교, 가족, 부모 등 모든 것과 단절하고 홀로 서기를 촉구하고 있다.

얼마전까지는 혼자가 괜찮다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같이 살고 있는 엄마가 죽는다면?

자기 관리라든지 일상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수도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삶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와 원동력의 상실이 가장 큰 문제다.

내가 꾸역꾸역 삶을 이어가는 원인은 그 무엇도 아닌 엄마의 존재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삶에 가깝게 해주는 연결고리이자 이미 죽어가고 있는 몸을 유지하게 해주는 산소호흡기가 엄마인 것이다.

엄마가 아니라면 딱히 존재할 이유가 없다.

마지못해 사는 삶을 붙잡고 있는 게 엄마인데 그게 사라지면 굳이 살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뭔가 이루고 싶고 그런 게 없다. 

삶의 이유가 되는 보편적인 것들, 성공이나 성취, 사랑이나 종교 같은 게 없다는 말이다.

그냥 눈을 뜨니까 사는 거고 안 죽으니까 살아 간다.

충분히 버겁고 괴롭지만 그렇다고해서 자살을 '선택'할 만큼은 아니기 때문에 산다.

같은 맥락에서 나쓰메 소세키가 말한 "죽음이 삶보다 고귀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가 "불유쾌함으로 가득 찬 이 삶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라고 고민했던 것을 이해한다.

그를 괴롭혔던 위궤양이 결국 삶을 끝내버렸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는 새로운 '시작'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삶보다 더 고귀한 세계가 열리는 시작 말이다.

+ 세계라고 쓰긴 했다만 이것이 천국이나 지옥같은 사후세계를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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