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성 장애 환자의 자살에 대하여
오늘, 자살하고 싶어졌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브런치에 이런 글을 종종 썼다.
양극성 장애는 '자살'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이것이 개인의 도덕적 문제가 아닌 질병 차원의 문제라고. 실제로 양극성 장애 환자들은 평생 1번 이상의 자살 시도를 할 뿐만 아니라 일반 인구와 다른 정신질환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자살 시도와 자살 성공률을 보인다.
양극성 장애 환자로 산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여전히 나는 '자살'과 지겨운 동행을 지속하고 있다. 일기를 안 쓴지 오래되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1년 정도는 그냥 무난하게 잘 지냈던 것 같다. 그러다 요 며칠 사이에 딱히 큰 이유 없이 그냥 '죽고싶어' 졌다.
5년차? 정도까지는 '자살'에 대해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했다. 마치 오늘 지구가 멸망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하지만 이제는 뭐, '자살하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이런 생각으로 산다. 아주 무덤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얽매이지 않는다.
중학교 때 도서관에서 이런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이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다. 사춘기의 부족한 사고력으로는 명확하게 내 생각을 풀어낼 수는 없었기에 그저 막연히 '맘에 들지 않는다' 정도로 끝났다.
어쩌면 나는 이때부터 남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조금 더 보태서 20년이 지난 지금, 그때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본심은 이런 것이 었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라는 말에는 "내가 이런 상황에서도 살고 있으니까 당신도 살아야 한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말에서 희망을 찾을지도 모르고 용기를 얻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이 말은 어디에도 쓸 데가 없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때로는 이런 말들에서 짙은 억압과 강요의 냄새를 맡을 때도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삶을 살건 간에 그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고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가 나에게는 죽어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은 보통 자기를 기준점으로 삼아 생각하고 말을 하기 쉽다. 성공한 사람들이 간혹 독선적이거나 폭력적인 경우가 그렇다. 자기들 기준에서는 가능했으니 남들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 생기는 많은 갈등들은 대게 자기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해서 그런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일반인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에 양극성 장애 환자가 아닌 사람들은 갖은 이유를 대면서 우리들(양극성 장애 환자)에게 자살하지 말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살은 금기나 다름 없으니까. 하지만 그 말은 당신들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누구도 자살이 양극성 장애 환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때문에 일반적인 관점에서 양극성 장애의 자살에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양극성 장애 환자에게 독이 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양극성 장애 환자를 만나거든 섣불리 자살하지 말라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한테 "수영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참 쉽죠?" 라고 하는 거나 다름 없으니까.
많은 양극성 장애 환자들이 증상 혹은 약물의 부작용으로 인해 광범위한 인지 기능의 결함을 지닌다. 인지 기능은 기억, 사고, 언어 등 '인간'으로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말한다. 때문에 인지 기능에 손상을 입은 양극성 장애 환자들은 실생활에서 그리고 직업적, 사회적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실직은 물론이고 이혼이나 대인 관계의 실패 등 다방면에서 동시 다발적인 문제를 경험한다. 양극성 장애 환자들 중 80% 정도가 발병 후 1년 내에 실직을 하고 대부분 사회로 복귀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지 기능의 결함으로 생긴 직업적 실패, 사회와의 단절, 대인 관계의 어려움 등이 양극성 장애 환자로 하여금 자살을 선택하게 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관찰해 본 결과 자살이 양극성 장애 환자의 삶 속에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기억' 때문이다.
기억은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기억이란 사건(이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상관 없다)과 감정의 결합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언가를 회상할때는 단지 무슨 일이 있었다, 가 아니라 어떤 일이 있었고 그래서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이것이고, 지금은 이렇게 느낀다 라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양극성 장애 환자가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
흑역사, 문득 생각하면 이불킥을 할 만한 기억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지는 그런 경험들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그 정도에서 끝난다.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시간이 덮어줄 수 있는 일이니까. 이것은 지금의 '나'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 환자들에게 흑역사는 심연이나 다름 없다. 특히 나처럼 1형 양극성 장애, 중증의 조증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겪는 심리적 고통은 트라우마에 가깝다. 조증 시기에 했던 일들, 일어났던 사건들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을 찌르고 머릿 속을 헤집는다. 게다가 이로 인해 현재의 자신에 대한 평가가 극도로 달라진다.
조증 시기에 했던 일들은 원래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내가 정말 이런 짓을 했다고?",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짓을 한걸까?" 같은 생각이 든다. 문제는, 부정하고 싶지만 그 사건을 내가 했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에 회피할수도 없다. "그건 조증 때문이었어."라고 합리화시키기 힘들 정도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에, 기억이 떠오르고 남는 것은 수치심, 스스로에 대한 분노, 좌절, 절망 뿐이다. 존재 자체를 심연의 밑바닥에 처박는 과정을 수시로 겪는 사람이 자살을 생각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그럭저럭 일상 생활을 잘 유지하고 있다가도 불쑥 조증 시기의 기억이 떠오르면 당장에라도 죽고 싶어 진다. 죽으면 기억이 사라질테니까.
게다가 한 번 조증을 경험한 사람들은 재발하게 되면 이전과 같은 끔찍한 경험들을 하게 될거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조증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단순히 텍스트로 조증 시기에 어떤 증상을 보인다 라고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당시의 느낌과 이후에 닥치는 여파를 제대로 알 수 없다. 내가 한 일이지만 동시에 내가 한 일이 아닌, 마치 한 몸 안에 두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을까. 내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불안을 넘어서는 '공포'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른다. 스스로를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양극성 장애 환자에게 자살이란 일종의 '구원'과도 같다고 본다. 몸의 상처는 치료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양극성 장애 환자의 '기억', 트라우마처럼 감당할 수 없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기억은 치료가 불가능하다. 양극성 장애 환자들 중 알코올 중독을 비롯한 다른 약물 중독의 비율이 높은 이유는 자가치료의 목적도 있지만 이런 끔찍한 기억을 잠시나마 잊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 나타날 지 알 수 없다. 양극성 장애 환자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무서운 이유다. 행복한 순간에도, 지구의 내핵까지 파고내려갔을 때도 상관없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툭 튀어나와 정신을 난도질하는 암살자가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양극성 장애 환자의 자살은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고 이 선택은 철저히 가치 중립적이다. 당신이 현재의 고통을 견딜 수 있고 또 그럴 만한 의미가 있다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견디며 살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면, 그로 인해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반대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다. 현재의 고통,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 양극성 장애는 완치가 불가능하다 - 이 고통의 굴레에서 지금 벗어나는 것과 끌어 안고 사는 것, 어느 것이 좋은 것일까.
자살은 죄가 아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동시에 자살은 개인에게 있어 최고의 자유다. 어쩌면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자유란 삶과 죽음을 선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태어난 게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데,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유의 최고봉이 아닐까. 따라서 당신이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자유고, 고통을 끝내는 것도 당신의 자유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는 지금 이 고통을 견디며 살만한 '의미'가 있는가. 양극성 장애는 막연히 나중에 좋아지겠지 라는 허무한 희망과는 거리가 멀다. 재발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다. 정말 빌어먹을 일이지만, 아무리 약을 잘 먹고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재발할 수 있다(물론 확률이 낮아지고 재발해도 증상의 정도가 비교적 심하지 않다고는 하는데 생각해보면 허무하기도 하다). 반복되는 약물치료를 견디고 증상과 약물의 부작용, 자살을 안고 살아가는 것. 이것은 단순히 "자살하지 마라" "언젠가 괜찮아질거야" 따위의 말로 가능하지 않다.
자살하지 말라고 하는 건 쉽다. 하지만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 그것을 위해 삶의 무게를 견디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러니 양극성 장애 환자에게 막무가내로 자살하지 말라고 하기 전에 자신이 정말로 이 사람이 자살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의 원동력을 제시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혹여나 알량한 몇 마디 위로와 주워들은 심리학 이론 몇 개로 해결할 생각이라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라. 당신이 가볍게 접근하기에는 우리의 자살은 참을 수 없이 무거우니까.
+ 해결책이랍시고 종교를 들이대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내가 무신론자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는 정신질환에 유익하지 않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개신교, 천주교) 정신질환을 귀신들림(...)이나 나약함, 죄 등으로 본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약물치료를 거부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약먹지 말고 기도원에 가라, 안수 받아라 뭐 이런 말을 공공연하게 한다. 본인도 들어봤다. 그러니 본인에게 좋다고 타인에게도 좋을 거라는 망상은 접어두길 바란다.
+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라는 책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읽지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