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에도 결이 있다
1.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지독한 현실주의자이자 허무주의자다.
양극성 장애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도 있겠지만, 발병 이전의 삶의 경험과 태생적 기질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다.
2.
그래서인지 나는 희망이나 긍정 같은 단어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에릭 호퍼를 좋아하는 이유, 그의 책을 얼마 읽지도 않았으면서 그에게 깊은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희망을 거부하고 오로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자기기만이 없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이 분출할 때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만, 전쟁을 이기고, 대륙을 제압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망 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3.
인생에는 의미가 있을까.
무신론자가 되기 전에는 종교가 내게 인간의 존재 이유, 삶의 의미, 그 목적에 대해 설교하고 강제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나를 지배했던 종교로부터 갖은 노력 끝에 탈출한 이후에는 나 스스로가 그 의미가 되어야 했다.
4.
하지만 양극성 장애를 겪으면서 점점 더 느끼는 건, 인생에는 의미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인간에게 주어진 건 그저 살아내는 것 뿐.
여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5.
요즘 다시 김광석의 <일어나>를 듣고 있다.
제목 때문에 희망찬 노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가사를 뜯어보면 딱히 그렇지 않다.
물론, 다시 시작하라는 말은 있다.
하지만 그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희망이 아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에, 의미란 없기에 우리는 방황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끝나버린다.
게다가 시간은 계속해서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인간 본연의 불안 또한 우리를 뒤흔든다.
인생이 허무한 이유는, "아름다운 꽃일 수록 빨리 시들어 가"기 때문이고,
"햇살이 비추면 투명하던 이슬도 한순간에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6.
그런데도 왜 "봄의 새싹들처럼" 다시 일어나라고 하는 걸까.
계절의 순환 속에서 봄은 시작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봄이 반복해서 우리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그저 반복될 뿐, 여기에는 딱히 의미가 없다.
우리는 단지 이 흐름에 맞춰 살아갈 뿐이다.
인간에게 의미란 사는 것 그 자체다.
절대적인 의미 같은 건 없다.
그 어떤 종교도, 신념도, 사상도 그것이 의미가 될 수는 없다.
단지 그런 것을 추구하는, 그럼으로써 살아가는 인간 자체가 의미인 것이다.
7.
따라서 다시 일어나는 건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그게 인생을 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확정된 인간에게 실패나 성공이나 무의미한 것은 마찬가지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슬픔과 기쁨, 성공과 실패, 사랑 이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 먼지처럼 흩어질 뿐이다.
그렇기에 계절이 순환하는 것처럼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걷는 것, 봄의 새싹들처럼 일어나는 것이야 말로 허무함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