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교사도 교사다
1.
가끔은 그냥 생각이 난다.
당신이 잘 지내고 있는지.
딱히 걱정이 된다, 궁금하다 그런 게 아니다.
왜 그런 거 있잖는가.
문득 생각난 유명인의 최근 근황이 궁금할 때.
내가 당신에 대해 궁금해 하는 정도가 그렇다.
2.
무관심이 미움보다 더 부정적이라고 했다.
요즘은 딱히 당신에 대해, 그리고 당신이 내게 준 상처와 고통, 거기서 비롯된 증오와 분노에 대해 이전만큼 마음을 쓰지 않는다.
어쩌면 체념일수도 있고 수용일수도 있고 -
아무튼 그렇다.
내게 당신과 함께한 27년이 아득히 먼 과거처럼 느껴지고 마치 신기루처럼,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당신이 없는 삶에 적응했다.
3.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었고 우리 가족의 행복을 바랬다.
심리학과에 간 이유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지, 우리 가족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당신을 빠르게 잊어버린 것도, 연민이나 죄책감 같은 게 없는 것도 그렇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최선, 아니 120%의 노력을 했다.
하지만 당신은 내 헌신과 희생을 걷어찼다.
엄마는 당신과 이혼한 이후로 한동안 - 어쩌면 지금까지 - 혼란스러워 했다.
부부와 부모-자녀의 관계가 얼마나 다른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혼란보다는 자유와 평안이 더 컸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끝을,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에 대한 일말의 기대와 희망을 정리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4.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인지는 모르겠다.
굳이 따지자면 당신이 엄마를 만난 것부터가 아닐까.
내가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진지하게 "도대체 왜 아빠랑 결혼했냐"고 엄마에게 물은 것은 단순한 원망이나 분노 때문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어울릴 수 없었으며 최소한 내가 가진 지식으로는 양자 간의 차이를 좁히고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할 것이라 기대할 수 없었다.
5.
나는 당신과 엄마를 보며, 차이는 다름을 낳고 다름은 갈등을 일으킨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과 엄마는 단순히 학력과 경제력, 장애인/비장애인이라는 신체 조건 이외에도 성격, 가족 내 역동, 가족 문화, 종교 그 어느 것 하나 맞는 게 없었다.
당신이 장애인인 엄마를 친가에서 다 이해하고 받아준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 그로 인해 엄마가 오랜 시간 친가에서 받아야 했던 수모와 고통을 기억한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좋은 그리스도인을 연기하다 집에서는 기독교를 박해한 네로처럼 행동하는 당신 덕분에 인간의 본성과 이중성에 대해 배웠다.
또한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없고 그 평가 또한 어떤 관계로 만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도 배웠다. 당신네 교회 사람들은 당신이 엄마를 때릴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이미 당신은 초등학생이던 나를 수차례 폭행한 후 내쫓은 적이 있었다는 걸 그들은 알까.
6.
또한 나는 당신의 거짓말과 폭언, 궤변을 통해 누군가 어떤 말을 할때 있는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 중에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처럼 선량하고 좋은 사람도 있지만 당신처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렇기에 타인을 믿기 전에 일단 검증부터 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7.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가족을 돌보지 않는 당신을 통해 감정의 진실은 말과 행동의 일치에서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과 자신 모두에게 사랑으로 느껴져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8.
선교사로 나가는 게 사명이라며 십년이 넘는 세월을 낭비하고 가족 모두를 고통의 늪으로 밀어 넣은 당신을 통해 종교가 인간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 깨달았다. 또한 가족을 내팽겨치고 기도원을 찾아다니던 모습 속에서 부모, 그리고 부부로서 지녀야 할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9.
당신과 엄마의 결혼 생활을 보면서 사람 중에는 절대 결혼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이 경찰서에서 엄마에게 "각자 자유롭게 살자"라고 했던 말을 기억한다. 우리는 당신에게 1순위가 아니었고 일종의 짐으로 여겨졌다. 또한 당신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야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의무와 책임만큼 당신과 거리가 먼 단어가 또 있을까. 파괴적이었던, 불행했던 원가족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남편이, 아버지가 된 당신을 통해 결혼의 최소 조건은 경제력보다 심리적인 건강함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부모가 어떻게 자녀의 마음과 정신, 인생을 파괴하는지도 체험했다.
10.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감사한다.
내게 반면 교사로서 최선을 다한 당신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