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불안에대하여
1.
시험은 진작 끝났는데 왜 난 아직도 시험기간인 거 같을까.
그건 아마도-
정규 학사 일정상 어제까지 기말 고사 기간이긴 해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2.
얼렁뚱땅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시작해버린 대학 생활.
재입학? 그게 뭐죠? 라고 했던 시기가 제게도 있었습니다...
근데 그걸 지금에서야 합니다-
3.
솔직히 음-
얼렁뚱땅 시작해서 얼렁뚱땅 보냈고 그래서 아주 당연하게 얼렁뚱땅 마쳤다,
이게 이번 학기 결산이라고...
4.
그, 내 안에 있는 제2의 자아, 완벽주의의 DNA가
이딴 게 대학 생활? 좀 더 열심히 하란 말이다!! 라고 채찍질을 휘둘렀으나
응- 너나 하세요 하면서 이 악물고 버텼다.
악착같이 참고 공부 안한 나를 칭찬...해(?)
5.
괜찮았을 때도 힘들었던 완벽주의는 양극성 장애 환자가 된 다음에도 여전히
아니 더 심각한 괴로움을 준다.
그때는 할 수있는 능력이라도 됐는데
지금은 불가능한 걸 뻔히 알면서도
관성적으로 완벽주의를 실현시키려고 하니까
힘은 힘대로 낭비하고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고
결국엔 증상 악화라는 악순환에 빠진다.
물렀거라 완벽주의 훠이!
6.
내가 뭐 이제와서 졸업장 하나 더 받자고 또 대학 생활을 한 건 아니라서
그냥 내가 듣고 싶은 수업만 골라서 들었다.
그래서 제대로 졸업할 수 있는지 나도 모른다.
7.
그나마 이번 학기 과목 중 절반 이상이 역사 관련 강의여서
강의 들을 때도, 시험 볼때도 그렇게 까진 힘들지 않았다.
다행히 양극성 장애 발병 이전의 기억들,
그러니까 장기기억의 일부는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어서
공부 안하고 본 시험에서 유용하게 써먹었다.
8.
돌아보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비록 성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강의 듣고 공부하고 이따금 수업 내용을 생각해보고
과제 하면서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고 굴려서 결과물을 만들어 냈던 것들.
그러니까 이게 얼마만인지 모를, 내가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 같은 것들.
누가 뭐래도 이 작고 귀여운(?) 성취가 내겐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그래도 뭐 내 일상은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물에 술탄듯 술에 물탄듯 흘러가지만 말이야-
9.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사람이름맞음!)는 플로우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무언가에 집중했을 때 느낄 수 있는 희열, 그 희열의 순간.
몰입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
사실 양극성 장애 환자가 된 이후로 그런 경험을 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와 '집중력' 이라는 인지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환자인 난 둘 다 없었으니까.
10.
양극성 장애 10년차가 되어서야 비로소 몰입이라는 걸 다시 해볼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전공이 아닌, 일본 근대사 수업 과제 하면서...!
내가 가장 잘하고 좋아했던,
일련의 논리를 설계해서 보기 좋게 쌓아올리는 일.
최근에 이렇게 도파민 솟았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과제가 아니라 놀이 같았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짜릿해, 너무 좋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그 결말, 메이지 유신에서 시작해 일본 제국의 패망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어떤 방향으로 근대화를 진행해야 하는지 쓰는 과제였는데 재밌고 신나게 쓰고 보니까
엄... 이렇게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파격적-
11.
오늘 새벽에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떴다.
진짜 악몽을 꿨다는 게 아니야
그냥 악몽을 꾼 사람이 깨어나서 흔히 느끼는 그런 공포와 불안을 느꼈다는 거지.
예전부터 난 이런 상황을 '실존적 불안'이라고 불렀다.
어떻게 보면 업보랄까.
그동안은 그때그때 매순간 현재의 불확실과 불안정에 대해 걱정하고
온통 암흑 그 자체인 미래를 불안한 눈으로 봤었는데
올해 초부터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부터 장기계획이라든지 그런 걸 싹 집어치웠거든.
뭐랄까,
오늘만 보고 산다?
이런 거 저런 거 다 치우고 생존: 스트레스 받지 않게 살자 라는 미션 하나만 갖고 살기로 했다.
너무 큰 미래를 그리지 말고, 아예 생각하지도 말고
조급하게 그 미래를 위해 대비하지도 말고
그날 그날 해야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불안'을 최대한 미루는 거.
특히 '시작'과 '실패'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
시작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고 힘을 줘야 할 거 같고
실패라고 하면 지나치게 무겁고 사형선고처럼 느껴지니까.
하다가 되면 된 거고 안되면 안 된거고.
12.
이게 나름 효과가 좋았다.
이런 마인드로 살기 시작하고나서 증상이 비교적 안정되었으니까.
계절성 우울도 스무스하게 넘겼고(매번 이 시기가 되면 입원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던...)
적당히 머리를 비우고(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사니까 편했다.
문제는 가끔 그렇게 미뤄둔 걱정과 불안, 공포가 밀린 청구서 날라오듯 한꺼번에 몰려올 때가 있다.
근데,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매일 조금씩 겪는 거 보다는 어쩌다 몰아서 받는 걱정+불안+공포가 더 낫지 않나.
적당히 포기하면서 사는 게 정신에 이롭다.
13.
아무래도 난 '항준적 사고'가 딱이다.
'원영적 사고'가 아무리 내가 혐오하는 비현실적 긍정주의와 다르다곤 하지만
도무지 나라는 인간 자체가 '긍정'하고는 거리가 먼 탓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게 너무 어렵다.
악플 생각이 나면 "0발00들!" 이라고 욕 한번 하고 넘기고
안 좋은 일 당하면 나만 *되는 거 아니다(=나만 망하는 거 아니다)라면서,
메멘토 모리를 끼얹은 정신 승리로 극복하는 거.
진짜 내 취향이야-
+항준적 사고는 이런 것!
https://www.youtube.com/watch?v=9aBX6XzpDFY&list=LL&index=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