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든 건 8할이 질문이었다
다소 두서 없이 쓰는 글.
완벽과 논리에 대한 강박을 뒤로 하고 이렇게 대충 휘갈겨 쓰고 나서 나중에 다시 제대로 쓰면 되는 게 아닐까?
1.
비관적이고 자조적인 질문은 아니다.
그냥 순수하게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정확히는 나는 왜 지금의 '나'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2.
어렸을 때, 내 기억도 엄마의 기억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는 것.
엄마는 내게 시계를 보는 법을 알려준 적이 없다고 했다.
다만 한동안 지금이 몇 시인지, 낮인지 밤인지 시시때때로 물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어느날 시계 보는 법을 깨쳤다고.
초등학교 가기 전 일이다.
3.
내가 왜 지금의 '나'가 되었는가에 대한 한 가지 가설이 있다.
어쩌면 이건 내 뇌가 그럴 듯한 이유를 만들어 붙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4.
고백하건데 내 유년은 시끄러웠다.
일반적으로 불행했다는 말을 쓰지만, 딱히 행복 혹은 불행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시끄러웠다고 하겠다.
5.
지금 돌이켜보면 아빠는 그때 이미 정신적으로 상당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다.
(이후에 심각한 성격장애 판정을 받기는 했다)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아빠는 심각한 가정폭력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부모의 학대와 방임이 그의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6.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가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사랑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는 화를 참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엄마 아빠가 싸우던 순간을 명확하게 기억한다.
양극성 장애 이후 단기와 장기를 막론하고 기억에 문제가 생겼음에도 그런 기억은 남아있는 걸 보면 그만큼 충격적인,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경험 중 하나가 아닐까.
7.
때때로 나는 아빠가 아이와 노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다.
대다수의 경우, 아빠는 아이에게 맞춰준다.
양자 간의 '놀이'의 주인공은 아빠가 아니라 아이다.
아이가 실수로 자신을 아프게 했든, 적당한 수준의 사고는 '아이'이기 때문에, 그것도 내 아이이기 때문에 넘어간다.
8.
하지만 그는 달랐다.
매번의 놀이(를 빙자한 학대)에서 자신이 이겨야만 했다.
학교를 가기위해 씨름과 유도를 했던 그는 줄곧 몸싸움으로 내게 장난을 걸곤 했다.
그리고 그 끝은 거의 같았다.
악에 바친 내가 통한의 일격을 가하고 그 대가로 폭언과 폭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9.
일반적이지 않은 부자관계는 내게 1차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는 왜 나에게 폭력적일까.
왜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할까.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랑이 아닌데?
10.
그 당시 우리는 외가와 함께 살았다.
2층으로 이루어진 주택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외삼촌은 2층에 살고 우리는 1층에 살았다.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많았던 형, 그리고 그를 돌보는 엄마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던터라 나는 내 유년의 대부분의 시간을 외가에서 보냈다.
11.
때문에 나는 두 세계에서 살아야만 했다.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안방에 햇빛이 찬란하게 들어오던 2층과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고 갈때마다 열에 아홉은 전쟁터나 다름 없었던 1층은 빛과 그림자처럼 너무나도 다른 세계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내 앞에서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내게 폭언을 하지도, 크든 작든 실수를 해도 화를 내지 않으셨다.
부드럽게 잘못한 점을 알려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셨다.
(할머니의 전설적인 양육은 따로 써볼 생각이다)
12.
어린시절부터 지속된 아빠의 가정폭력과 15번이 넘는 이사, 그 가운데 있었던 학교 폭력, 파산 등 숱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나마 지금만큼 어느 정도 '기능하는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외가의 힘, 2층에서의 시간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어렴풋이 진짜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고, 예의범절에 대해 교육받았고, 인간이라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볼 수 있었다.
13.
그 당시 아빠는 전도사였고 지금의 내가 아주 싫어하는 유형의 개신교인이었다.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은 그게 누구라도 나쁘거나 혹은 하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
당시 외가는 대다수가 천주교인이었고 제사를 중시하는 유교적 문화가 매우 강했다.
천주교에다 제사까지 더해졌으니 아빠 눈에는 좋아 보일 수가 없었겠지.
처가살이하는 마당에 직접적으로 뭐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 탐탁지 않아했다는 건 어린 내 눈에도 뻔히 보였다.
14.
하지만 내 시선에서 누가 더 옳은지, 누가 더 나은 사람인지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였다.
교회다닌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폭력적이고 사회규범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과 교회는 안 다녀도 이웃에게 친절하고 도덕적이고 성실하게 자신의 인생을 산 사람.
다소 엄격한 종교 교육을 받고 개신교적인 분위기와 가치에 익숙했던 나에게 그럼에도 종교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했던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건 외가인데 단지 교회를 안다닌다고, 예수를 안 믿는다고 나쁘다거나 지옥에 간다느니 하는 말은 어렸음에도 너무나도 불합리해 보였으니까.
15.
내가 유년기에 배운 긍정적인 것의 대부분은 외가에서 왔다.
특히 글을 쓰는 것, 교육과 학습에 대한 열망이 그렇다.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상이용사로 제대해서 고졸도 아닌 중퇴로 학력을 마쳐야 했던 할아버지.
그래서인지 은퇴한 이후에도 매일 신문을 읽고 책을 읽고 글을 쓰셨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절반은 책상에서 무언가를 쓰거나 읽는 모습이었다.
16.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함께 신문을 읽고 시간에 맞춰 뉴스를 보고(7시 뉴스, 12시 뉴스, 9시 뉴스 등등) 책상 앞에 앉는 걸 좋아하게 됐다.
여기에 책과 가까워질 수 있게 목소리가 안나오도록 책을 읽어준 엄마의 눈물겨운 노력이 더해졌으니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17.
뿐만아니라 잦은 이사로 친구를 사귈만한 시간이 없었던 유년 시절, 책은 친구이자 도피처였다.
시끄러운 집안과 아빠의 폭력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때 함께 했던 건 책이었다.
잦은 이사로 도시에서부터 제주도와 산골로 옮겨다니며 이런 저런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학교 폭력을 당했을 때도 책은 늘 곁에 있었다.
+제주도와 산골에서 왕따를 당했던 이유 중 하나는 '달라서'였다. 도시 사람(?)이라서 그랬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인간은 다름에 대해 적대적일 수 있다는 걸 체득했다.
18.
그래서 나는 학구적이고 질문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대학생 때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심지어 연구실까지 따라가서 질문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교수님도 나도 암묵적으로 대학원 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인생 내 마음대로 안되더라... 대학원 수업 청강할 때만 해도 1년 뒤에는 진짜 대학원생으로 여기 있겠지 했는데 정신차려보니 폐쇄병동...)
19.
특히 내가 가지고 있던 근원적인 질문은 "인간은 왜?"였다.
아빠는 왜 폭력적이고 어떤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할아버지는 아빠와 달리 근면성실하고 타인에게 관대할까.
아빠가 어린 시절 심각한 가정폭력을 당했고 매우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지만 그보다 더한 경험을 한 할아버지는 왜 다른 삶을 살게 됐을까?
할아버지는 6살 때 어머니의 사망을 경험했고,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상이용사로 제대, 불편한 몸으로도 최선을 다해 고등학교 중퇴에도 불구하고 유한양행에서 정년퇴직까지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왜 이 애들은 내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적대적일까.
20.
그래서 나는 심리학을 전공했다.
처음에는 철학과를 고민했었는데,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철학이 인간을 주제로 삼기는 하지만 인간만 연구하는 게 아니라 심리학이 더 내 질문에 적합한 답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철학과보단 심리학과를 나오면 할일이 많아서(!) 그런 것도 있다.
물론 내가 입학할 때 심리학과는 좀 유망한 학과 정도였지 지금처럼 심리학이 대중적인 학문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비트코인 초창기와 같다고 해야할까.
21.
아무튼 나는 일련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내 선택에 의해 지금의 내가 되었다.
물론 여기에 환경과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
22.
어쩌다 이 글을 쓰게 됐냐고?
요양(?)하는 느낌으로 시간을 보낸답시고 기껏한다는 게 재입학이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어서.
7년 전에 방송대 시작했다가 증상 악화로 한 학기를 통으로 날린 다음 유야무야 휴학하고 결국엔 복학 못해서 제적당했다.
그러다 말로는 대학생 혜택 받겠다는 이유로(어도비가 무려 60%할인...!) 재입학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핑계고 그냥 공부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니냐고.
시험 공부는 따로 안했지만 나름 수업은 열심히 들었다.
정규 과목 다 재끼고 어차피 졸업/졸업장이 목표가 아니니까 공부하고 싶은 과목만 들었다.
공부하면서 재밌기도 하고 아직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일부 인지 기능 때문에 속터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1년을 돌아보면 방송대 재입학이 가장 잘한 선택이다.
뭐, 딱히 공부해서 이걸로 뭘 하자는 건 아니고-
그냥, 음. 그냥 해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