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Hubris

안녕, 어도비

6년의 시간

by Argo

오늘부로 어도비와의 6년간의 동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담백한 이별, 은 아니고

찐득하고 질척이는 결별에 가깝다.




우리의 이별이 쿨하지 못했던 건 둘 다 미련이 남아서다.

어도비 입장에서는 '나'라는 호구 고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도 몰라.'

'조만간 배워서 쓸 거니까.'

라는 이유로 모든 앱 구독을 6년 동안 이어왔다.


남들이 다 하니까 구독한 것도 아니고

구독 당시에는 확실한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배워서 써 본 일이 있기 때문에 더 미련이 남았던 거다.

책 편집 툴인 인디자인을 독학해서 할아버지의 평생 염원이자 숙원이었던

회고록을 세상에 내보냈으니까.

(솔직히 이거 다시 하라고 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다.

수기로 작성한 회고록 수백 페이지,

그것도 한문이 절반이 넘는 내용을 엄마나 사전을 통해

아니면 직접 상경해서 할아버지께 물어보면서 작성했으니까.

혼자서 하느라 거의 1년 넘게 걸렸다.)


내 인생 최대 업적인 할아버지 회고록 출간에 기여했다는 사실과

앞으로 인디자인뿐만 아니라 포토샵... 등등을 배워두면

언젠가는 써먹겠지 라는 생각에 쭉 구독을 했던 거다.


문제는 무려 6년의 시간동안 제대로 써 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

인디자인도 회고록 작업 막바지에 몇 개월 정도만 썼을 뿐,

그 이후에 또 쓸 일은 없었다.

막연한 다짐과 기대로 월 2~4만원의 돈이 성실하게 어도비한테 넘어갔다.


나의 미련과 어도비의 상술이 더해지니 얼렁뚱땅 구독이 길어졌다.

해지를 결심할 때마다 어도비는 몇 개월 무료,

혹은 학생할인 보다 더 파격적인 할인(!)으로 날 유혹했다.

월 18,000원에 1년을 써본 적도 있다.

마지막 1년은 20,400원...

이게 말이 되나.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 마냥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진짜 갈 거야?"

라고 묻는 어도비를 두고 어떻게 가겠냐고.


하지만 나란 인간은 기어코 이 사슬(?)을 끊어내고

어도비와의 인연에 끝을 고했다.

언제까지 막연한 기대에 사로잡혀 시간과 돈을 흘려 보낼 수는 없으니까.




6년의 시간을 함께한,

내 인생 최고의 업적에 동참한 어도비에게 안녕을 고하며

내가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로 마무리하려 한다.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 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 김광진, <편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는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