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Hubris

인생사 새옹지마

알퐁스 무하와 '진인사 대천명'

by Argo

나와 친구 - 고등학교 때 부터 2년간 같은 반을 하고 가족 이외에 내가 양극성 장애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가족 혹은 그 이상으로 소중한 사람이다 - 는 대체로 집돌이 성향이라 만나면 밥먹고 까페가서 이야기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조금 변화를 주면 영화나 전시회가는 정도? 둘 다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고 - 만나서 술먹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 조용한 걸 좋아하다보니 이 루트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다.


중소기업에서 인생의 쓴 맛을 본 뒤에 '각성'(?)한 친구가 6개월만에 공시에 합격해서 다음주에 임용 연수를 간다. 가기전에 한 번 더 만나려고 약속을 며칠전에 잡았는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드라이브 제안을 해왔다. 외출을 즐겨하지 않는 내향인이지만 가끔 자연 속에 가는 건 좋아해서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래는 탑정호 쪽을 가려고 했으나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아서 장태산으로 길을 잡았다(그런데 장태산에 도착하니 날이 화창하게 변했다는 게 함정...).


준비해 간 음식을 먹고 스벅 - 내가 까페를 가면 무조건 스벅인데, 그건 형이 매달 일정 금액을 사용할 수 있게 카드를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 에 가서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내 폰케이스를 보더니 잠깐 들여다 봤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케이스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와 알퐁스 무하의 <조디악>이다. 요즘은 <조디악>으로 하고 다니는데 친구가 관심을 보이길래 알퐁스 무하에 대해서 짤막하게 설명해줬다. 그러면서 친구와 함께 '인생은 새옹지마', '운칠기삼', '진인사대천명'이라며 웃었다.


작년에 시민대학에서 <아트 인문학>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여러 화가들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는데 거기서 알퐁스 무하를 알게됐다. 다른 화가들의 삶도 인상 깊었지만 무하의 삶은 내게 더 큰 울림을 주었다. 그의 삶은 롤로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았고 - 나중에 잘 되긴했지만 이건 결과론적인 거고 - 그런 상황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과 그에 따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하는 20대 초반에 한 극장에서 일을 하면서 바쁘고 힘든 와중에도 예술을 하려는 마음을 먹었다. 수입은 변변찮았지만 그래도 꿈만은 늘 간직하고 있던거다. 그런데 21세 때 극장이 화재로 불타면서 실직을 하게 되고 여기서 첫번째 변곡점을 마주하게 된다.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예술을 할 것인가'

무하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운을 시험해보기로 한다. 기차를 타고 무작정 가다가 여비가 떨어지는 곳에서 머물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오스트리아-체코 국경 지역인 <미쿨로프>. 무하는 낯선 곳에서 자신의 운을 시험하며 마을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스스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다 점차 소문이 나고 그것이 어느 귀족의 귀에 들어갔다. 그리고 귀족의 후원으로 독일 뮌헨과 파리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드디어 꽃길을 걷는 듯한 이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29세에 후원이 중단된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변곡점을 마주한다. 예술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무하는 파리에서 책과 잡지의 삽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고 그림을 그렸다. 무려 6년 간이나 삽화가로 무명 상태를 지속했는데, 당시에 삽화가는 화가로 쳐주지도 않을 만큼 하찮게 여겨지는 직업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직 예술을 하겠다는 열망 아래 6년이라는 시간을 꿋꿋이 버텨냈고 그 시간 동안 다른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기다림 끝에 기회가 찾아온다.


당대 예술가들의 뮤즈이자 유명 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가 무하가 일하는 곳에 전화를 한다. 포스터 제작 의뢰였는데 당시에 다른 사람들은 다 휴가를 가서 없고 무하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맡게 된 포스터를 그리게 된 무하. 그리고 이 포스터가 무하의 인생을 바꿨다.

무하의 포스터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그 포스터를 떼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순찰을 해야할 정도였다고도 하니 그 열광적인 반응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지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무하는 사라 베르나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그녀는 무하에게 포스터에 더해 무대와 의상까지 맡겼다.


이후 무하는 정말로 꽃길을 걷게 된다. 물론 중간에 아메리칸 드림의 좌절과 나치의 고문,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긴 하지만, 당대의 예술가치고 상업성과 예술성 두 부분에서 성공을 거둔 이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이 정도면 잘 풀린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다.

무하의 작품은 그의 경험들이 녹아 있다. 극장에서 일했던 경험이라든지 어린 시절에 관심을 가졌던 것들이 그의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아마도 그가 생계를 위해 했던 일들이 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무하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다보면 인생과 노력, 열정, 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무하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술에 대한 열망, 열정이 그를 사로잡았고 숱한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요즘 종종 노력에 대한 회의론이 등장하는데 노력하면 반드시 이뤄지지는 않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게 노력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무하는 어려움이 닥치든 말든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생계가 어려울 때는 하찮은 일도 하면서 말이다. 내가 어찌되었든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냥'한다. 성과가 있든 말든, 그저 내가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물론, 무하가 운이 좋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무하가 귀족의 후원을 받지 않았더라면 - 비록 끊기긴 했어도 -, 그리고 사라 베르나르의 전화가 왔을 때 다른 사람이 받았더라면 무하는 무명의 예술가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후대에 위대한 예술가로 남은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여럿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한 가지는 무하가 그 운을 잡을 실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준비된 자만이 다가오는 행운을 잡는다. 만약 무하가 그저 그런 그림을 그렸다면 한 장의 포스터로 인생이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 뭔가 뚜렷한 결과가 안나온다고 해서 포기할 게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의 길이라고 여겨진다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는 게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여러 번의 실패를 양분 삼아 다시 도전하지만 어떤 사람은 실패를 견디지 못한다. 무하는 안 풀리고 잘 풀리고가 반복되는, 이른바 '희망 고문'을 정말 제대로 당한 사람이었다. 나는 때때로 작가의 길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 - 이때는 대게 양극성 장애라는 녀석이 한 몫 한다 - 무하의 삶을 떠올린다. 자신의 삶에 대한 믿음과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 무하처럼 비록 지금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내가 사랑하는 일이니까 해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글을 쓴다. 만약 운이 좋다면 내 글이 빛을 볼 수 있고, 그렇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적어도 죽을 때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다가 죽는 다는 사실에 후회하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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