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Hubris

담배 한 대와 믹스 커피 한잔

경험해 봐야 아는 것들

by Argo

2014년 여름, 뜨거웠던 그 때의 나는 스물네 살이었다. 더운 것은 날씨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에 집을 뛰쳐나왔다. 어떻게 보면 사춘기 때 꾹꾹 눌러왔던 에너지가 그때 분출했을지도.

최대한 내 손으로 살고 싶어서 - 물론 그래도 지원을 받았다 - 방세를 벌기 위해 법성포로 내려가 1주일간 일을 했었다. 학교 선배의 부모님께서 굴비 포장재 도소매를 하시는데 그곳에서 일했다.


스티로폼 박스나 종이 상자들 트럭에 싣고 배달하고 정리하는게 주 업무였는데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동안 여러 알바를 해봤으나 이번처럼 육체 노동을 해본적이 없었기에 힘들었던 것도 있지만. 스티로폼 박스 한 봉지 - 한 봉지에 5개 정도 들어 있다 - 가 아니라 3~4봉지를 나르다보면 나름 무게가 있었고 그것도 수십 봉지를 나르다 보니 진이 빠졌다. 작업 중 백미는 얼음 상자를 나르는 일이었다. 한 박스에 거의 20kg 정도 되는 박스를 트럭에 싣고 냉동 창고에 쌓다보면 온 몸이 다 아팠다. 내가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발을 들이민 느낌이 들었다.


아침 8시 정도부터 시작한 일은 12시쯤 밥을 먹기 위해 잠깐 중단되었다. 남도 지역답게 주변 음식점에서 정기적으로 배달이 왔는데 반찬이 12가지가 넘었다. 보통 때 먹어도 맛있었을텐데 고된 일을 하고 먹으니 이보다 더 맛있는 식사가 없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이 날 정도로.


밥을 먹고 나서 나른함을 쫓기 위해 나를 비롯해 일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믹스 커피 한 잔을 뽑아 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전에는 줘도 안먹던 믹스커피를 찾아서 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마시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었기에 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셨다. 신기하게도 믹스 커피와 담배 한 대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해줬고 오후의 작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줬다.


그 때 나는 왜 육체 노동하는 사람들이 믹스 커피와 담배를 즐기는지 알게 되었다. 좋아서 마시는 것도 있겠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살기 위해서, 하루를 버티기 위해서 믹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는 거였다. 믹스 커피가 다른 커피보다 몸에 안 좋은 건 알지만 그 달달한 맛이 짭짤한 땀을 대신해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마찬가지로 몸에 해로운 담배지만 믹스 커피와 함께 잠을 쫓아주고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지금은 믹스 커피는 물론 그 어떠한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카페인에 민감한 몸 덕분에 홍차를 비롯해 카페인이 들어간 차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끔 나는 믹스 커피 한 잔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 해 뜨거웠던 여름에 마셨던 뜨듯한 커피 한 잔을, 더운 열기와 함께 들이 마셨던 담배를, 그리고 노동과 땀에 대해 깊이 체험하고 느낄 수 있었던 법성포의 짠내를 떠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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