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그래서 더 재밌고 흥미로운
"경계인(境界人)이란 오랫동안 소속됐던 집단을 떠나 다른 집단으로 옮겼을 때, 원래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금방 버릴 수 없고, 새로운 집단에도 충분히 적응되지 않아서 어정쩡한 상태에 놓인 사람을 말한다.
이 말은 나치즘을 등지고 미국으로 향한 쿠르트 레빈(K. Lewin, 1890∼1947)이 사용한 심리학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용어가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발표된 최인훈씨의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이 경계인으로 묘사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2003년 송두율 교수사건 이후 다시 이 용어가 회자되었는데, 뮌스터대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재독 사회학자인 송두율 교수는 자신의 저서 <경계인의 사색>에서 자신을 ‘경계의 이쪽에도, 저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선 위에 서서 상생의 길을 찾아 여전히 헤매고 있는 존재, 경계인’으로 규정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계인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회색 지대(그레이존) : 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불분명한 중간지대를 뜻하며, 정치에서는 초강대국 세력권에의 포함 여부가 불분명한 지역을 이름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엘비스 프레슬리는 "사람마다 지문이 다 다르듯 우리는 각기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경험을 해석하며 사고하는데 대게 그 시선은 자기가 서 있는 위치다. 위치는 다양한 요소들의 교차점으로 인종, 국가, 성별, 교육수준, 종교, 경제력 등 사회경제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인간은 소속과 안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집단, 즉 자기의 뜻에 맞거나 자기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동체에 소속되려고 한다. 이 공동체 -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직업 등 여러 영역에서 만들어 지는 - 는 구성원들에게 행동과 생각의 토대가 되어주고 구성원들 간의 공통점 - 서로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용어나 관습, 의복, 주거 등 - 을 제공함으로써 소속감과 안정감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인간에게 이런 공동체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자 필연적으로 하나 이상의 공동체에 소속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집단인 가족 또한 공동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처음 소속되면서 각기 다른 가족 문화 - 행동 양식, 암묵적 규칙, 갈등 해결 방법 등 -를 습득하고 내면화하여 그것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 전체를 아울러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가 가족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나름 만족하며 살아간다. 공동체의 규칙이나 구성원간의 갈등으로 힘들어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순응하며 혹은 체념하며 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남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공동체의 가치관의 불일치를 이유로 공동체를 떠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을 '경계인'이라고 표현하는데 앞에 인용한 사전의 내용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나는 '경계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송두율 교수의 정의처럼 "경계의 이쪽에도, 저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선 위에 서서 상생의 길을 찾아 여전히 헤매고 있는 존재"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고 여러 경험으로부터 내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만들어졌다. 친가와 외가는 너무나도 다른 사회경제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부모님은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만큼 같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교육수준도 집안의 경제력도 가족의 분위기도 너무 달랐다. 그 아래에서 나는 줄곧 혼란을 겪어야 했다. 집안 사정으로 어릴 때 외가에서 많이 생활했던 - 그 당시에는 2층 단독 주택에 살면서 1층은 우리 가족이, 위층에는 외가가 살았다 - 나는 2층의 외가에서의 경험 - 예의범절이 강조되고 비교적 따듯하고 밝은 분위기 - 과 1층의 우리 가족에서의 경험 - 부모님의 잦은 갈등과 그로 인한 다툼, 삭막하고 어두운 분위기 -의 괴리로 고생해야 했다. 1층과 2층의 경계 사이에 끼어있는 듯 했다.
게다가 타고난 성격 탓에 학교에 들어가서도 경계인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외가에서 배웠던 예의범절을 토대로 혼자 자원해서 교실 청소를 하는 반면에 '어린이인 우리는 뙤약볓에서 운동회 연습을 하고 어른인 선생님들은 천막에 들어가서 쉰다, 이건 불공평한 일이다' 라며 연습하다 말고 운동장에서 곧장 집으로 온 일도 있었다(집에 있었던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혼내지 않았다. 단지 사라진 나를 선생님께서 애타게 찾고 있을 거라며, 그리고 가방을 가져와야 하니까 다시 학교에 가라고 했을 뿐이다. 엄마의 지혜로운 대처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면 - 어른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 은 커서도 지속되었다. 내 생각과 지식, 양심 등에 비춰봤을 때 이해할 수 없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라면 상대가 누구든지 상관하지 않고 - 부모님, 주변 어른, 선생님 등 일종의 권위를 가진 사람을 포함해 - 저항했다. 저항의 방식은 다양했는데 질문을 하거나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하거나 표정을 구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직접적인 저항을 하지는 못했지만 - 이런 행동이 권장되지 않고 또 심각한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빠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한 대가로 무자비한 폭력을 수차례 경험한 후부터는 더욱 그랬다 -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실질적인 경계인이 되었다. 고등학생 때 열렬한 진보주의자였다가 차츰 그 사상과 진보주의자들의 행동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그 반작용으로 잠깐 보수주의자가 되었으나 이 또한 염증을 느꼈다. 결국 한동안 정치적으로 회색지대에 속해있다가 최근에는 실용주의와 휴머니즘,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보나 보수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는 열렬한 개신교 신자였다가 - 모태신앙으로 교회에서 충성 봉사하던 엘리트 신자였다 - 지금은 불가지론적 무신론자(혹은 온건한 무신론자) - 무신론자이면서도 종교에 대해 완전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내가 만들었다. 대다수의 무신론자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종교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는데 비하여 나는 신의 존재가 없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신이 존재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간이 알 수 없으므로 결과적으로는 무신론에 가깝다), 종교에도 나름의 유익이 있고 긴 시간 동안 종교가 간직한 문화유산은 유용하다는 입장이다 - 가 되었으니 경계에 있어도 정말 제대로 경계에 있는 셈이다.
경계인이란 말이 언뜻 보면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느 한 쪽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건 앞에서 말한 소속감을 주는 그 어떤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따라서 공동체가 해결해 주는 부분을 나 혼자서 해야하는, 어렵고 고독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송두율 교수의 정의는 경계인으로서 내가 현재 처한 상황과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어느 한쪽에 속해있지 않으면서 나름의 해답을 찾고 균형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간다. 정해져 있지 않은 길이기에 이리저리 헤매기도 하고 수렁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좌충우돌하면서 나만의 '무언가' - 삶의 태도, 규칙, 인생 철학 등 - 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재밌고 흥미롭다.
아직 딱 이거다 싶은 나만의 체계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다만 지금까지 겪은 경험과 고민을 통해 몇 가지 축을 세웠는데 그건 앞에서 언급했던 '실용주의', '휴머니즘', '회의주의' 다. 이 세가지 기둥은 내가 살면서 마주하는 여러 문제들 - 종교, 정치를 포함해 - 을 판별하고 해결하는 기준이다.
'실용주의'는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대게 어떤 사상이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은 그 사상과 공동체의 강령에 따라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려고 한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되는 강령임에도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상황에 따라 가장 타당해 보이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 방법이 어떤 사상의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단지 지금 유용한지 아닌지만 따지는 것이다. 흑묘백묘론과 동일하다고 할까.
'휴머니즘'은 어떤 사상에 대해 생각하거나 대두된 문제를 들여다 볼때 인간과 인간의 존엄에 입각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다. 감정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문제나 이해 관계가 얽혀 있어서 거부감이 드는 문제라도 '인간의 존엄'의 관점에서 볼 때 합당한 선택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회의주의'는 줄리언 반스의 <삶을 사랑하는 기술>에 나오는 "보다 건강한 회의론"으로 "몇몇 가설은 증거에 기초해서 보면 다른 가설들보다 더 그럴듯하다"라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틀릴 수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기존의 관점, 타인의 관점 또한 그럴 수 있고 그렇기에 보다 근거가 있는 가설을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는 건 그 기준을 따르는 다른 사람과의 친밀감이나 소속감, 기존의 기준을 따르면서 느낄 수 있는 안도감, 편리함을 포기하고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내는 고생길을 자청하는 것이다. 때때로 이 길은 너무나 어렵게 느껴지고 막막하기도 하며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나 혼자라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나처럼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투쟁한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을 볼때마다 누군가 나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길이 내게 흥미로울 뿐 아니라 내게 더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하기에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