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외일 줄 알았는데?
"바로 그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당시 나는 30대 중반으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꺼번에 추락하고 말았다. 장밋빛 삶과 전도유망한 미래가 날아가버렸다. 1996년 12월 10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나 자신이 뇌질환에 걸려 있었던 것이었다. 뇌졸중이었다. 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나의 뇌가 정보 처리 능력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감각기관이 느껴야 할 어떤 자극도 느껴지지 않았다. 뇌 속에서 일어난 출혈 때문에 나는 걷지도 말하지도 읽지도 쓰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이 되어버렸다."
- 질 볼트 테일러, <긍정의 뇌>
요즘 읽고 있는 <긍정의 뇌>는 전도유망한 뇌과학자에서 뇌졸중 환자가 된 저자가 자신이 경험한 뇌졸중에 대해서 쓴 책이다. 생생한 체험을 뇌과학자의 시선에서 썼기에 더 흥미롭고 다른 수기에 비해 느낌이 다르다.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저자가 본인이 뇌졸중에 걸릴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처럼, 나 또한 심리학을 배우면서 양극성 장애(조울증)가 생기리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이상심리학을 비롯한 수업 시간에 양극성 장애를 비롯한 여러 정신 질환을 배우면서도 이것들은 내가 상담 장면에서 만나게 될 내담자들만의 문제라거나 논문의 주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 정신 건강에 어느 정도 - 많은 정신적 외상이 있었으나 꾸준히 잘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자신이 있었고 양극성 장애는 나와 상관이 없는 단어였다.
그러다 내가 이 양극성 장애임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약물치료를 처음 받던 날, 나는 이전의 내 모든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다. 저자의 말처럼 "한꺼번에 추락"했고 "장밋빛 삶과 전도유망한 미래가 날아가버렸다."
당시의 나는 줄곧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조증이 나타나기 직전 학기에 하나 빼고 다 A+를 받았을 정도였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학생이었고 심리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도 높았기에 교수님들의 눈에 들었다. 나에게는 확고한 계획이 있었는데, 자격증을 딴 후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영어 실력이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적어도 박사 학위는 해외에서 받고 싶었다. 당시에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문화심리학'은 우리나라에서 배우기 힘든 분야였기에 제대로 배우려면 해외에 있는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수 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다 강력한 조증의 쓰나미가 밀려와 내 삶의 전 영역을 뒤덮고 지나간 뒤에 우울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우울증에 이르러서야 날뛰던 뇌가 정신을 조금 차리고 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의 느낌은 절망 그 자체였다. 수업시간에 배웠고 책에서 읽었기에 너무나도 잘 안다고 자부했던 양극성 장애가 나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은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이 끝났다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양극성 장애는 내가 세웠던 모든 계획이 사라짐과 동시에 끝이 보이지 않고 언제 빠져나올지 모르는 수렁에 들어갔다는 의미였으니까.
병원에 처음 갔다온 날의 기록 - 2015.3.9일의 일기란 제목으로 브런치에도 올려져 있다 - 을 보면 그때의 혼란함이 잘 나타나 있다. 전공자이기에 다른 환자들에 비해 병식이 빨리 생겼으나 - 대다수의 환자들은 자신에게 정신 질환이 생겼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약물치료를 비롯해 모든 치료를 거부하기도 하고 보호자와 의료진과 갈등을 빚으며 증상을 악화시킨다 - 양극성 장애 자체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정체성과 양극성 장애의 구분, 양극성 장애가 내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정의를 내리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양극성 장애 초기에는 내 정체성의 중심에 양극성 장애가 있는 것 같았다. 나 = 양극성 장애 라는 공식이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이것이 내 모든 생각과 감정, 행동에 뿌리내렸다. 양극성 장애는 내게 낙인과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웠다. 내가 양극성 장애라는 사실을 말하기가 두려웠고 더 나아가서는 양극성 장애와 함께 살아가야하는 삶이 두려웠다.
그러다 차츰 나는 양극성 장애가 내 일부임을, '나'라는 존재의 중심이 아니라 그저 '나'를 이루고 있는 한 요소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양극성 장애는 내 전체가 아니다. '나'는 양극성 장애로만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해서도 안되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나는 그렇게 나와 양극성 장애의 관계를 정리해 나갔고 동시에 양극성 장애와 함께 사는 삶에 대해 고민하며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 대체로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5단계로 나눴다. 눈 앞에 닥친 현실을 부정하는 단계에서 시작해 슬픔을 느끼고 분노와 좌절을 표출한다. 그리고 과거에 대해 자책과 후회를 하다 마침내 수용에 이른다.
나 또한 나는 예외일 줄 알았던 양극성 장애를 마주했을 때, 위의 5단계를 거쳤다. 하지만 경험상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거 같다. 수용의 단계에 이른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슬픔과 분노, 좌절, 좌책과 후회가 삶의 과정 속에서 튀어 나온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들은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왔기 때문에 수용 이후에는 아무런 단계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는 만성질환이고 완치의 개념이 없다. 평생 함께 해야 하는 질환이기에 수용했다고 해서 늘 마음이 편안할 수 없다는 거다. 양극성 장애와 함께 산다는 건 수용이란 밑바닥 위에 체념과 부정, 분노와 슬픔, 자책과 후회가 떠다니는 것과 같다. 수용의 크기가 클 때는 다른 것들이 작아보이고 실제로 영향을 적게 미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반대가 된다.
예상치 못한 일이 닥쳤을 때 대게 사람들은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보통 그 원인을 찾으면 해결책이 나오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를 비롯한 정신 질환은 원인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 대체로 유전을 비롯한 선천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밖에 여러 요인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은 자칫하면 끊임없는 질문에 빠져 지칠 수 있다. 나 또한 초기에는 그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고 나름의 분석을 마쳤지만 확실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원인에 대해서 잘 고민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앞으로의 삶이 나아질 수 있는지 생각하고 실천한다. 때로는 그 원인을 찾는 것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 왜냐하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고민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고 그렇다면 고민하는데 에너지를 낭비하기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게 더 건설적이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하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런 사고 방식은 내가 양극성 장애를 대하는 태도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도 가끔씩 내가 왜 양극성 장애에 걸렸는지, 왜 하필 내가 걸린건지 의문이 생기고 화가 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감정을 다독이고 그것에 집중하기보다 현재를 어떻게 잘 살것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또 다른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그 원인을 분석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 그러다보면 문제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감정 소모도 덜하게 되어 감정을 다스리고 정신 건강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
인정하고 수용한다고 해서 양극성 장애의 무게가 가벼워진다거나 - 조금은 그럴 수도 있지만 - 치료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양극성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삶의 방식도 달라진다. 내가 양극성 장애를 통해 문제 해결법에 대해 배웠듯, 어쩌면 삶이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일을 던져주는 건 그 사건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스캇 펙의 말처럼 "문제에 부딪치고 해결하는 전 과정이야말로 삶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