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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ail of Argo

양극성 장애와 비만

부작용(1) 그래도 약물 치료는 계속되어야 한다

by Argo

본격적으로 약을 먹기전, 그러니까 극심한 조증 이후 우울증의 나락으로 막 떨어졌을 때 내 체중은 58kg이었다. 27~28인치를 유지했던 시기였고 얼마전 10년 넘게 나와 함께 했던 친구가 보여준 그때의 사진에는 광대뼈와 턱 사이로 홀쭉한 볼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내 체중은 74kg에 허리는 33~34인치. 작년 여름부터 다이어트와 운동을 시작해서 겨우 감량한 수치다(작년 초에는 88kg까지 나갔었다).


양극성 장애(조울증)를 비롯해 대부분의 정신 질환에서 비만은 바늘과 실 같은 관계다.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대다수의 약물이 직간접적으로 비만과 연관성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복용해왔던 약물들의 부작용에 보면 한결같이 비만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이것은 약물의 작용 과정에서 식욕을 증가시키는 등의 과정을 통해 비만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핏 보기에 비만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니 뭐 살이 찔 수도 있지', '살 찐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

하지만 내가 경험한 비만은 생각보다 더 심각한 문제고 삶의 질을 확연히 떨어뜨리는 약물의 부작용 중 하나다. 또한 비만은 약물 치료를 거부하는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 - 특히 여성에게서 이 점이 두드러진다 - 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비만이 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약물 뿐만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녀석도 한 몫 한다. 수치로 따지면 5.5로 약물의 근소한 우위랄까.

우울증 상태에서는 기본적인 활동량이 뚝 떨어진다. 내 경우에도 우울증으로 막 접어든 시기부터 극심한 우울증 시기에 자살 충동으로 입원한 경우를 생각해보면 우울증이 비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건 명백하다.

사람마다 증상의 차이가 있지만, 우선 우울증 시기에는 밖에 나가는 그 어떠한 활동에 대한 의욕이 사라진다. 내 경우에는 씻기조차 힘들어해서 엄마가 화장실에 밀어 넣은 적도 있을 정도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밥은 열심히 먹고 잠도 아주 많이 잔다. 이러다 보면 원래 있던 에너지도 없어져서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기 때문에 더 활동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악순환의 연속인 거다. 실제로 나는 1주일에 병원가는 하루만 밖에 나간 적도 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보면, 그리고 우울증 특유의 무기력함과 겹쳐지면 자연스럽게 살이 찐다. 살이 찌는 것도 문제지만 체중의 증가는 무릎이나 허리 등 여러 관절에 악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체중이 80kg을 돌파했을 때 조금만 걸어도 내 발목과 무릎은 비명을 질렀다. 복부 비만과 장시간 앉아 있는 습관 - 심각한 우울증 시기에는 게임을 하느라, 상태가 좋아진 이후에는 독서와 글쓰기 때문에 - 덕에 목 디스크와 허리 디스크까지 겹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리고 비만은 심혈관계 건강에 직격탄을 날린다. 2년 전부터 고지혈증을 비롯해 지방간, 고혈압, 당뇨병 등에 대한 빨간등 혹은 노란등이 켜졌고 1년 넘게 고지혈증 약을 먹으며 운동을 한 결과 비로소 괜찮아졌다.

게다가 비만은 자존감에도 영향을 주는데 어느 순간부터 거울을 보는 게 두려운 걸 넘어서 싫어졌다. 예전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살이 찐 내 모습은 양극성 장애 이후에 변한 모습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무능력하고 어딘가 망가진 듯한 모습. 예전의 날카롭고 생동감 넘쳤던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사육당하는 한 마리의 돼지 같았다(실제로 나는 내가 한 인간이 아닌 사육당하는 동물이라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이런 경험들은 자존감을 확 떨어뜨리는데 일조했을 뿐더러 은둔 생활을 지속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가뜩이나 우울증으로 외출하길 싫어하는데 비만이 겹치니 나가지 않을 이유가 추가된 것이다.


약이 식욕 자체를 증가시킨다면, 우울증은 생활 습관에 영향을 미쳐서 비만으로 이끄는 상호작용을 한다. 이 둘의 협동 공격은 매우 절묘해서 방어하기가 쉽지 않다. 나 또한 여러 노력을 했지만 자주 실패했으며 지금도 체중 감량과 증가를 반복하고 있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조금씩 체중을 감량하면서 나의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조언을 하자면, 내가 체중을 감량하게 된 몇 가지 상황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재작년 말부터 나는 약물 조정에 들어갔다. 내가 세 번째 만난 의사 선생님은 여러 병원에서 경험을 쌓은 분이셨고 인지치료를 같이 하시면서 나를 세심하게 살펴보셨다. 내가 선생님의 처방전을 대로 약을 복용한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조심스럽게 약물 조정에 대해 이야기 하셨고 우리는 1주일 단위로 조금씩 약을 증감하면서 서서히 약을 줄여 갔다(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선생님께서 내게 약물 조정이라는, 대다수의 의사들이 꺼리는 작업을 제안한 이유는 약을 먹기 시작한 날부터 단 한 번도 약물 치료를 중단하지 않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나는 실수로 깜박 하지 않는 한 - 이런 날은 극히 드물었는데, 매일 알람을 해놓기도 하고 앱으로 체크하면서 빠뜨리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 최선을 다해 약물을 복용했다).

약물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나는 인지치료와 상담치료(병원과 연계된 상담센터에서 진행)를 병행했고 이 부분도 영향을 주었는지 점차 인지 기능이나 활동 수준이 회복되어 갔다. 마침 허리 통증으로 찾아간 재활의학과에서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30분 이상 걸어야 한다고 했기에 다이어트 + 허리 통증 완화 + 고지혈증 문제 개선(이때 고지혈증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를 해결하려고 정기적으로 헬스장을 다니기로 했다. 특히 허리 통증이 주된 이유였는데, 통증이 너무 심각해서 단 10도 앉아 있을 수 없는 날도 있었기 때문에 운동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약물 조정과 운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더해져 나는 점차 활동량을 늘려갔다. 초기에는 식욕의 변화가 그리 없었지만, 점차 줄어드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한번에 라면을 2개 끓여 먹고, 코스트코 피자를 한 번에 최소 4개 이상 먹었다. 1주일에 치킨을 3~4번씩 먹었고 그것도 한 마리를 다먹은 다음에 소스에 밥도 비벼 먹었다. 아, 물론 야식도 빼먹지 않고 먹었고(새벽에 몰래 컵라면을 먹었다. 과자도 숨겨 놓고 먹고. 진짜 미친 식욕 때문에 자괴감 든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에 못 먹어도 2500~3000칼로리는 먹었던 거 같다.

매일 오전에 운동을 하고 1주일에 한번 나갈까 말까 하던 게 2번으로, 3번으로 늘어나자 체중에 변화가 생겼다. 초기에는 1시간 정도 아주 낮은 속도로 러닝머신에서 걷다가 점차 빠른 속도로 걸었고 요즘은 30분 정도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뛰기를 반복하는 인터벌 운동을 하고 있다(처음부터 낮은 강도로 시작했던 건 무릎과 발목 상태가 심각하게 안좋았기 때문이다. 내 육중한 몸을 버티기엔 역부족이었다).

주로 오전에 운동을 하기 때문에 기상 시간도 빨라졌고 하루 일과의 틀이 조금씩 잡혔다. 신체 건강을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정신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공 시간에도 배웠고 나도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우울증에 운동이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크다. 운동을 하면서 나는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내가 무언가 한다는 사실 자체가 성취감을 주었다. 변화의 폭은 크지 않아도 1달 뒤, 2달 뒤에 조금 더 많은 거리를 걷고 살이 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과 자신감이 생겼다. 더불어 운동은 인지 능력 개선에 매우 효과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그 효과를 체감했다. 그리고 다른 약물 부작용 중 하나인 운동 능력의 저하 또한 개선될 수 있었다.

지금은 운동 없는 하루와 운동으로 시작하지 않는 아침은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초기에는 헬스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게 정말 힘들었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인데도 도살장 가는 기분이었으니. 그래서 나는 이런 방법을 썼다. 너무 가기 싫은 날에는 일단 헬스장에 가는 것만 하는 걸로. 최소한 헬스장에 출석 도장만 찍는 거다. 그러다 보면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10분이라도 하고 가야지' 하는 마음이 점차 생기고 점차 습관이 형성되어 간다. 운동의 효과 - 허리 통증 완화와 정신건강 증진 등 - 를 경험하고 난 이후에는 운동의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게 되었다.


식욕은 서서히 줄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조절하기가 어렵다. 단 음식이 엄청 땡길 때가 수시로 있어서 자제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내가 쓰는 방법은 음식을 먹는 순간에 깨어있는 거다. 내가 지금 음식을 먹고 있는 사실과 내가 먹는 이유, 지금 포만감을 느끼는 정도 등에 집중하는 것이다. 특히 음식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면 포만감이 드는 시점을 빠르게 알 수 있고 의식적으로 음식물의 과다 섭취를 막을 수 있다.


비만은 양극성 장애를 견디는 과정과 약물 치료 과정을 어렵게 하는 부작용 중 하나다. 그럼에도 극복할 여지는 항상 있으며 일정 부분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지금 비만으로 고민하고 고생하고 있다면, 당장 운동화부터 신고 딱 1분만이라도 밖으로 나가보자. 공기 한번 들이쉬고 햇빛 잠깐 본다음에 다시 집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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