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저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니까요
"언젠가 우리는 늦은 밤 어두운 골목길을 더듬다가 넓고 밝은 길을 나오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아무리 작은 실개천도 이윽고 강을 만나고 드디어 바다를 만나는 진리를 감사하였습니다. 주춧돌에서부터 집을 그리는 사람들의 견고한 믿음입니다. 당신이 비록 지금은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발로 당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한 언젠가는 넓은 길, 넓은 바다를 만나리라 믿고 있습니다. 드높은 삶을 '예비'하는 진정한 '합격자'가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어디쯤에서 당신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드높은 삶을 지향하는 진정한 합격자가 되십시오)
내가 좋아하는 Imagine dragons의 노래 중에 <Amsterdam>이라는 노래가 있다.
어디선가 이 노래가 보컬인 댄 래이놀즈의 자살에 대한 경험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는 걸 읽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날 때가 많다. 내가 힘들었던, 양극성 장애(조울증)가 나를 인생의 밑바닥으로 끌어 내렸을 때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가사에서 엄마에게 실망시켜드려서 미안하다고, 요즘 잘 지낸다고, 사실은 잘 지내지 못한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극심한 조증을 겪고 나서 심각한 우울증을 맞이했을 때가 그랬다. 내가 저지른 많은 잘못들과 밀어닥친 현실에 너무 괴로웠고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는 자책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눈을 감을 때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고, 눈을 떴을 때는 지옥보다 더한 현실이 주는 무게에 압도당했다.
약 기운에 누워 내가 했던 일들과 그로 인한 결과들, 그리고 지금의 현실을 마주하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터널에서 벗어날 방법은 '자살' 뿐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 확실히 죽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집에서는 항상 가족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집 근처의 산에 올라가면 샛길로 인적이 드문 곳이 있으니 튼튼한 밧줄을 구하면 딱이겠다 싶었다. 그래서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을 먹고 동선을 비롯해 여러가지 준비사항을 생각해냈다. 머릿속으로 과정을 상상하며 나름의 실험을 했다.
불행 중 다행일까. 나는 약 기운을 버티지 못했고 - 밥도 간신히 먹고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잠과 겨우 씨름하는 상황이었다 - 지금까지 살아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양극성 장애와 함께하면서 겪어야 할 자살과의 동행의 첫 걸음이었을 뿐이었다. 우울증이 깊어질수록 자살충동과 자살사고는 깊어졌고 끝내 입원을 해야하는 단계에 이르기도 했다. 나는 면도날에서 - 그래서 한동안 화장실에서 면도기를 찾을 수 없었다 - , 그리고 지나가는 차에서, 고층에서 내 삶을 끝내야 겠다는 계시를 받았고 아슬아슬하게 그 시기 때마다 입원이라는 피난처를 통해 삶을 연장했다(이건 내 노력 - 자살 충동과 자살 사고가 있을 때 솔직하게 표현한 것 - 과 엄마의 노력 - 내 이야기와 행동, 상태에 대해 민감하게 체크하고 반응 한 것 - 이 합쳐진 결과다. 아마 엄마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흙 속에 있을지도?).
증상이 나아진 지금도 나는 여전히 자살의 존재를 삶 속에서 깊이 느낀다. 문제가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불쑥 찾아오는 자살이라는 녀석의 강력한 유혹은 너무나 달콤해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만 싶다.
이 문제는 비단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2011년 전국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에서는 양극성 장애가 자살기도와 가장 관련이 있는 정신질환으로 조사되었고, 한 연구에서는 양극성 장애에서의 자살기도의 평생유병률은 20~50%로 조사되었다. 양극성 장애의 자살에 대한 논문들을 메타분석한 결과에서는 양극성 장애 환자의 25~50%가 자신이 사는 동안 자살을 시도하고, 전체 양극성장애 환자의 10~15%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이것은 일반인구의 20~30배에 해당하는 매우 높은 수치다(<양극성 장애 : 조울병의 이해와 치료>).
내가 양극성 장애 초기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조울병 치유로 가는 길>에서는 양극성 장애에서의 자살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대개 우울 삽화나 혼재성 삽화 중에 자살하는 경우가 더 흔하지만, 정신병적 상태나 조증 삽화 동안에도 충동성이 증가하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자살을 시도할 수 있다."
"비극적인 것은 자살 생각과 느낌이 생리적, 유전적 소인을 가진 양극성 장애 증상 중 하나라는 것이다. (...) 즉, 자살 충동은 양극성 장애의 신경생리와 연관이 있는 것이며, 한 개인의 나약함이나 도덕적인 결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해서 이 때문에 동떨어진 느낌을 갖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양극성 장애를 겪는 모든 사람들은 살다가 어느 시점에 자살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다(이 부분은 책에서도 굵은 글씨로 되어 있다) ."
책에서는 "양극성 장애가 없는 사람들도 막연한 자살 생각을 가질수도" 있지만, 양극성 장애 환자들은 "훨씬 더 자주, 더 강하게 이런 생각이 들고, 좀 더 구체적으로 이를 계획하여 행동에 옮기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인다.
양극성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자살'과 이것에 대한 생각, 시도는 다른 사람들이 겪는 것보다 더 심각하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문제다. 우리는 늘 자살과 마주하고 혹은 동행하며 살고 있고 언제나 일상에서 도사리고 있어 삶을 뒤흔들 준비가 되어있다(그러니 제발 우리한테 의지 부족이니, 잘못된 것이라느니 하면서 우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우리는 다른 증상도 힘들고 자살과의 힘겨운 투쟁 속에서도 충분히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이것에 대한 주변인 - 심지어 가족들의 - 의 몰이해와 부정적인 반응에도 그렇다. 때때로 이런 주변인의 반응에 상처받고 더 힘들다고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주변의 반응이 양극성 장애 환자들의 자살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까지 3번의 입원을 경험했다. 그 중 2번은 심각한 자살 충동으로 입원했고, 병원은 도피처로 훌륭하게 내 자살을 막아주었지만 거기서의 경험과 기억은 그리 좋지 않다(사실은 너무 끔찍한 경험이어서 종종 입원했던 때가 꿈에서 나타나는데 그런 꿈을 꿀 때는 진짜... 죽을 맛이다).
+입원 경험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룰 예정.
다른 병원도 그렇겠지만,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는 방수 재질의 종이에 환자의 간단한 인적 사항이 적혀진 팔찌를 항상 하고 다녀야 했다. 특히 폐쇄 병동에서는 투약이나 피검사 시에 이 팔찌를 꼭 확인하는 과정이 필수다. 그래서 나는 3개의 팔찌가 서랍에 있다.
엄마는 이 팔찌를 왜 가지고 있냐고 묻는다. 엄마 또한 기억하기 싫은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 집에 있는게 싫은 거다. 하지만 이건 내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기억하는 나만의 기억보관법이며 자살이, 그 존재가 내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나는 내 삶에 있었던 모든 기억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이 설령 고통과 좌절의 기억일지라도 내 삶의 일부분이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내 삶의 사건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다. 그 무엇도 피하지 않고 덮어버리지 않고 부정하지 않고 직시하며 기록하는 것. 이것이 내가 양극성 장애와 자살을 대하는 태도다(어쩌면 이건 할아버지가 회고록을 기록하는 걸 보고 자랐기 때문일지도. 그래서 내가 그 모습을 통해, 생의 경험을 통해 작가가 되기로 은연중에 마음을 먹은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일상에서 다시 자살이 찾아올 때면 반지에 새겨 둔 라틴어 명언인 "Hoc quoque transibit",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되새긴다. 그러다보면, 그리고 내 기억의 책장 속에 찬란한 빛을 뽐내고 있는 행복과 사랑에 대한 기록이 내게 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다시 되살려준다.
다시 Imagine dragons의 노래로 돌아가보면, 가사 중에 "Your time will come if you wait for it, if you wait for it"이라는 부분이 있다. 양극성 장애와 함께 한다는 건 '기다림', 즉 양극성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 약물 치료를 수용하고 거기에 적응하는 것, 비록 지금은 빛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 빛을 볼 수 있을 것을 기다리는 과정이다.
나는 오늘도 이 기다림에 하루를 보내고 그 기다림이 조금씩 현실이 되는 걸 지켜보고 있다. 아주 작은 변화지만 작은 시냇물이 모이고 흘러서 거대한 바다로 나아가듯, 언젠가 뒤돌아봤을 때 현저하게 달라진 나를 발견할 수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