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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ail of Argo

우선 순위와 양극성 장애

일단 숨은 쉬어야 하고 싶은 일도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by Argo

양극성 장애가 발병하기 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좋은 성적을 얻고 학구열을 만족시키기 위해 밤샘은 기본이었고 교회 일 - 불과 7년전만 해도 난 독실한 개신교인이자 대학부 임원이었다. 지금은 뭐... 독실한 무신론자고. - 을 비롯해 알바와 취미 생활을 하기 위해 시간 단위도 모자라서 10분 단위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했었다.


나름의 성과도 있었고 인정도 줄곧 받았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든 나날들이 이어졌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비롯해 신경성 두통 등에 시달렸고 늘 무언가 해야한다는 강박관념과 알 수 없는 공허감에 불안했다.


건강을 등한시한 채 앞만 보고 달리다가 양극성 장애를 만났고 그 때부터 이전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비교적 뒷전이었던 '건강'이 최우선 목표가 된 것이다.


양극성 장애와 함께 산다는 건 언제나 몸과 마음의 컨디션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야 며칠 동안 잠이 부족해도, 이틀 정도 밤을 샌다고 해서 당장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수면 패턴과 수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밤을 샌다거나 무리하게 무언가를 하다가 컨디션이 나빠지면 기분 상태의 변화나 다른 재발의 징조가 나타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보통 견딜 수 있는 피로의 정도가 100 중에 80 정도라면 우리는 3~40 정도면 이상 신호가 나타나고 얼른 휴식을 취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초기에는 이런 점이 너무나 마음에 안들었다. 각종 양극성 장애의 증상과 약물 부작용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죽겠고만, 이런 패널티까지 끌어안고 살아야한다는 게 분하고 억울했다(인생 참...). 뭐, 지금도 가끔은 너무하다 싶지만 서서히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깨달은 건 - 양극성 장애라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이지만 -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건강이 바탕이 되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더 읽고 싶고,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더 앉아 있음으로 무리를 해서 증상이 악화되거나 재발이 되면 잠깐의 만족 뒤에 긴 고통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가 열 걸음은 더 뒤로 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양극성 장애에 관련된 실질적인 조언을 담은 책들을 보면 양극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컨디션에 따라 일정을 조절할 수 있는 직장이나 상황을 마련해야 하며 평소의 일정 또한 여유롭게 잡아서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더 나아가 지금의 직장이 양극성 장애의 특성상 맞지 않을 경우 이직을 권유하기도 한다.


솔직히 발병한지 5년이 지나고 4년 반의 투병 생활에 접어들면서 내 나이대의 사람들을 볼 때마다 조급함이 드는 건 있다. 내년이면 서른 - 김광석님의 '서른 즈음에'가 들리는 듯 하다 - 인데 대부분 취업을 했거나 준비중이고 조금 빠른 사람들은 결혼을 할 때인데 나는 그들에 비해 조금, 아니 많이 늦은 게 아닌가 싶은 거다. 그래서 종종 불안하고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때면 머리를 흔들어 털어내고 당장 해야하고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아직은 다소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확실한 안정기에 이르도록 수면시간을 지키고 매일 운동을 하는 것. 당장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고 작가 준비를 위해 달릴 수는 없지만, 매일 일기를 쓰고 한 편의 글을 꾸준히 쓰는 것.

신기하게도 정해놓은 매일 꼭 해야할 일들을 하다보면 압박감이나 불안감의 크기가 줄어든다. 막연히 미래를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 보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긍정적인 결과를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이 과정이 다시 걷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양극성 장애의 회복 기간은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는 과정 혹은 운동 선수가 부상 후에 재활 훈련을 받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양극성 장애 이후에는 그 이전과 같은 삶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을 뿐더러 이전에는 가능했던 일들을 이전에 했던 만큼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양극성 장애의 증상과 약물 부작용으로 인해 인지 기능을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유의미한 손상 및 기능의 저하가 나타나고 이 부분은 양극성 장애 환자의 회복과 사회 복귀에 악영향을 미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다룰 예정).

따라서 아기가 걸음마를 배울 때 수없이 넘어지듯 좌충우돌하며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만의 걸음 걸이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큰 부상을 당한 운동선수가 긴 재활 기간을 버티는 것처럼 당장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천천히 해야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해야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지금은 나름 익숙해졌지만 때때로 이 길고 긴 재활 기간이 답답하고 막막한 느낌이 든다. 포기하고만 싶은, 망망대해에 뜬 작은 돛단배의 심정에 주저 앉으려고 할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 마법의 주문(?)이 있다. 외출할 때 자주 끼고 다니는 반지에 각인한 "Hoc quoque transibit(이 또한 지나가리라)"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유명한 소설의 문장이다.

나는 이 두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의 힘듦도 고통스러운 재활 과정도 어느 순간 지나가고 내일이, 내일의 태양이 뜰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보자고,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다독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그런 주문이 하나쯤은 있으면 도움이 될테니, 없다면 하나 만드는 걸 추천한다. 아, 물론 그런 주문을 쓸 상황이 없으면 가장 좋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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