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 공감은 차라리 안하는게 낫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에서 '공감'이라는 키워드가 대세다. 어딜가나 공감이 중요하고 타인의 말에 공감해주어야 하며 공감능력이 대인관계에서 핵심적인 능력으로 여겨진다.
공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수록 '공감의 방법론' 또한 봇물이 터지듯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개중에는 실제 상담자들이 쓰는 방법들도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는 학문적 기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공자로서, 상담을 해본 사람으로서, 그리고 10명의 상담자를 만났고 2년 넘게 한 상담자에게 지속적으로 상담을 받는 나로서는 현재의 흐름이 거북하고 불편하다. 목적도 수단도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공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전공 서적의 학문적 정의를 빌리지 않고서도 그저 단어의 뜻만으로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감정의 공유, 정확히 말하면 상대방의 감정을 내 감정처럼 느낀다는 거다.
중요한 것은 이 공감에는 '가치 판단'이 없다. '연민'이나 '동정'이 공감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의 두 단어는 모두 상대방과 상대방의 경험, 감정에 대한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공감은 상대방의 감정을 내 감정처럼 느끼고 그 심정을 이해하는 것이지 상대방을 불쌍하다거나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여기는 게 아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 이것이 공감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가"다. 인간의 공통된 감정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공유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과 그로 인해 느끼는 감정, 그 감정의 깊이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타인에 비해 민감한 사람은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다르게 느끼기도 하고 그 사람의 환경이나 성향에 따라 다르게 지각한다. 애초에 각자의 경험이 다르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우리는 절대로 '같은 경험'을 할 수 없다. '비슷한' 경험만 할 수 있을 뿐이고, '비슷한' 감정만 느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의 공감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우리가 절대로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다.
공감에 대해 기술적인 접근을 하는 사람들은 알량한 테크닉으로 공감하려고 한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재해석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이해했음을 알려준다. 대화에서 느껴지는 대략적인 감정을 캐치해서 "그래서 참 ~했겠네요"라거나 아예 직접적으로 "공감한다"는 말을 내뱉는다. '공감의 상투화', 혹은 공감의 '일상화'가 되는 것이다.
나는 공감이 나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우려하고 싫어하는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공감에 대해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앞서 공감이 상대방의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감정을 느끼는 것도 공감의 요소 중 하나지만 '이해' 또한 중요하다. 감정에는 전염성이 있어서 그 자체로도 느낄 수 있지만, '이해'함으로써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이것은 인지치료의 기반이 되는 이론적 배경이기도 하다. 생각이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것이다). 상대방의 경험에 대한 이해는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문제는, 우리가 상대방의 경험과 비슷한 - 똑같은 경험을 하기란 불가능하기에 - 경험을 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그 감정을 느끼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그렇기에 나는 쉽게 공감한다고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공감을 받는 사람은 대게 영혼 없는 공감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럴 때 공감을 받는 사람은 공감이 아닌 동정이나 연민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고 더 나아가서는 배신감 마저 느낄 수 있다. 마치 상대방이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느끼는 것과 동일하다. 그렇기에 진실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은 공감은 몰이해보다 더 나쁘다. 상대방이 나에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건 서로의 경험 차이에서 나타나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대해 공감을 못한다고 비난할 수 없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그 사람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감하지 못하는 것에는 공감할 수 없다고 하는게 오히려 낫다. 억지 공감은 앞서 말한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내가 쉽게 공감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여기에 있다. 그저 "공감한다"고 상투적으로 내뱉는 말에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공감한다는 건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몰이해를 감추기 위해 변명조로 내뱉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공감할 수 없을 때는 "그런 일을 겪어서 이런 감정을 느꼈을 거 같고 잘은 모르겠지만 이랬을 거 같아"라는 식으로 말한다. 명확하게 공감하지 못했다는 말을 하지는 않지만 - 때로는 그렇게 말하기도 하지만 - 내가 공감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감을 하더라도 '공감'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기보다는 '이해'한다는 말을 선호한다. 상대방의 경험이 어떤 경험인지, 그래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조금은 - 완벽하다고 하는 건 기만이므로 - 이해할 수 있는데 그건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앞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는 '정말로 내가 이 사람의 말에 공감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진실되지 않은 공감은 오히려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애초에 우리는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타인이 자신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그런 '불완전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공감을 원하기에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 사람에게 공감해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공감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공감할 수 없는 것에 공감한다고 말하는 건 그 자체로 기만이며 기만은 진실한 관계를 가로막는다. 차라리 정직하게 공감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저 묵묵히 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종종 주변에서 공감을 '받아내려'하는 사람들을 본다. 이런 공감을 강요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지만 나중에 다루려고 한다. 그리고 당신이 모든 사람을,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공감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 중에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상대방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기거나 '공감 셔틀'로 여기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공감을 해주기에 앞서 내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도 생각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