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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보라 Nov 18. 2024

#9. 이건 내가 그토록 기다려온 기회야!

이혼 후 10년 #9

다시 가족이 되기로 결심한 우리 부부는 서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려고 애썼다. 나는 각자의 수입과 생활비 공유, 직장 생활을 위한 배려와 서로의 신뢰에 대해 얘기했다. 남편은 시댁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해 왔던 둘째 자녀에 대해 다시 꺼냈다. 첫아들이 태어난 지 8개월 무렵부터 시댁 식구들이 한두 마디씩 거들던 말이라 말이라 전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라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우리는 일과 가정을 양립하기 위해 각자의 회사 일정을 고려해 아들의 돌봄 스케줄을 조율했다. 양육과 집안일의 무게를 어느 정도 나누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야 가족다운 모습이 되어가는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안도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서서히 차올라오는 걸 느꼈다. 가정이 안정되니 회사 일도 자연스럽게 잘 풀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한 무대기술박람회에 동료들과 함께 출장할 기회가 생겼다. 여느 때 같았으면, 아이를 누구에게 맡길지 많은 고민을 했겠지만 처음으로 가족의 배려 속에 평화롭게 출장길을 떠날 수 있었다.      

업무를 거의 마치고 귀국을 준비할 즈음 회사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나만 혼자 브로드웨이로 넘어가서 2주간 다음 신작 준비를 위해 무대 노하우를 배워올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내가 이 업무를 수락하면 향후 1 한국에서 처음 올리는 라이선스공연을 위해 매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건 내가 그토록 기다려온 기회야."

아들을 떠올리며 잠시 망설였다. 이번 업무를 맡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앞으로 회사에서 중요한 작품을 맡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중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눈앞에 주어신 임무에 충실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10년간 꿈꿔왔던 브로드웨이!

그곳의 최신작 노하우를 익히기 위해 뉴욕 현지 극장으로 단숨에 날아갔다.       

케네디 국제공항을 거쳐 TV로만 봐왔던 브로드웨이 42번가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모델처럼 차려입은 뉴요커들이 한 손엔 커피를 들고 바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개를 조금만 들어 올리면 전 세계 기업들의 광고가 쉴 새 없이 흘러가는 전광판과 브로드웨이 최신 공연들을 알리는 화려한 극장 네온사인이 내 시선을 압도했다.        


10년 전, 대학 졸업 후 배고픈 배우 생활을 할 당시, 우연히 TV에서 본 지컬 공연장으로 무작정 영문이력서 5통을 들고 달려갔다. ‘오늘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꼭 이력서를 주리라!' 다짐하며 비장하게 공연장에 도착했다. 돈이 없어 공연장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았다. 

순간,  '공연은 못 봐도 화장실은 쓰기 위해서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무리지은 외국스태프들이 나의 다급함을 눈치채고 화장실이 있는 곳을 알려줬다.  덕분에 국내관계자와 연이 닿아 1년간의 인턴생활을 시작으로 대형공연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때부터 반강제로 맡게 된 음향, 조명, 무대 등의 기술 통역 업무를 해낸 덕에 나는 남들보다 훨씬 빨리 업무를 익힐 수 있었다.  낯선 무대 용어와 잦은 오역 때문에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을 많이 고생시켰지만... 집에 가서 내 머리를 쥐어뜾을지언정 절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버텨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드디어 꿈이 이뤄졌다는 감격도 잠시, 냉정한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십수 년간 경력을 쌓은 해외 디자이너들과 일하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더 험난했다. 호주에서 보낸 8개월의 워킹홀리데이가 전부였던 내가 날카롭고 성격 급한 디자이너들의 현지 발음과 속어들을 즉각 알아듣고, 현장 노하우를 익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나는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아시아 파트너사의 무대기술 대표자로 왔기에 한국에서 실행되어야 하는 모든 무대 요구 사항들을 깐깐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 요구사항들이 한국에서 제대로 실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과연 내가 이걸 잘 해낼 수 있을까?"

불안감이 내 마음을 잠식하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더 어려운 순간도 잘 버텨왔잖아!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어!" 그 다짐 하나로 브로드웨이 극장과 호텔을 오가며 숨 돌릴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곳에서 만난 최첨단 기술과 화려한 무대 연출을 배우는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짜릿하고 행복했다.


귀국 후 나는 브로드웨이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공연 준비에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 도착한 오리지널 해외 스태프들과 함께 세트 제작소와 극장을 오가며 세부적인 무대 제작에 몰두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들에 봉착했고, 브로드웨이에서 온 스태프들이 한국 공연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압박감이 점점 나를 옥죄었다. 이대로 가다간 지금까지 쌓아온 나의 커리어를 망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마음을 짓눌렀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나는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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