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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보라 Nov 21. 2024

#12. 안빈낙도를 꿈꾸는 명퇴한 백수!

이혼 후 10년 #12

그날 이후, 진지하게 남편과 대화를 해야 했다. 정말 명예퇴직을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래야 하는 상황인지 정확한 확인이 필요했다. 길고 답답했던 대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앞으로 안빈낙도하면서 살겠다. 나중에 작은 섬으로 이사를 가서 살자. 나는 씨를 뿌릴 테니, 네가 경작을 해서 먹고사는 걸로 하자."

어느덧 망각해 버린 예전에 그와 나누었던 답답한 대화들이 기억났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절대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되는 대화들... 부부상담을 하고, 재결합을 결정하게 했던 그 정신과의사가 갑자기 떠오르며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이제 나도 더 이상 그의 말도 안 되는 행동에 끌려 다닐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도 만삭 때까지 기를 쓰고 회사에 계속 나갔다간, 백수 남편이 되고 싶은 그의 허황된 꿈만 키워줄 것 같았다. 그나마 맞벌이였으니까... 늦은 밤 퇴근하고 어질러진 집을 마주해도 참을만했다. 하지만 백수 남편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질러진 집안과 내팽개친 아이 가방과 마구 벗어놓은 옷가지들, 먹다만 그릇들을 보게 된다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시어머니께 그의 명예퇴직 의사를 알리니 역시나 그의 결정을 지지하셨다.

 "아비 몸에 더러운 게 생겼는데 어떻게 일을 계속하냐"라고 하셨다.

그렇게 그는 나의 강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40대 초반에 삼식이 남편이 되었다.


덕분에 나도 어려운 결정을 아주 쉽게 할 수 있었다.

계획보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계를 빨리 내고 한시적 백수가 같이 되기로 한 것!      

그렇게 나는 그와 불편한 출산 준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나면 하루 종일 남편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투닥거리는 새로운 일상을 살게 되었다.

      

 "애미야! OO 아빠는 집에서 뭐 하고 있냐?"  수시로 시어머니는 남편이 아닌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안부를 확인하셨다. 한숨으로 답하는 나에게 시어머니는 나중에 고향으로 내려오면, 커피숍이라도 차려줄 수 있으니 어떤 업종이 좋은지 천천히 알아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임신한 나보다 아들의 건강을 더욱 걱정하시며 잘 챙겨주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이제는 정말 나도 출산 준비를 하며 제대로 된 쉼을 얻고 싶은데...

여전히 내 인생의 중심에는 내가 아닌 그들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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