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타인의 관심과 참견 사이
이혼 후 10년 #32
새로운 직장은 첫날부터 많이 시끄러웠다.
지역 예술인들을 위한 공모사업 심사 결과를 보고 불만의 제기하러 예술인협회 등에서 대거 몰려왔다.
덕분에 나는 지역예술인들의 첫 대면을 사죄의 자리에서 하게 되었다.
애초에 전혀 심사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회사를 대표해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민원을 받아야만 했다.
시청 맞은편에 있는 회사는 모든 팀이 넓은 하나의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있었다.
한 팀에서 큰소리가 나게 되면, 다른 팀들이 괜히 눈치를 보게 되는 그런 구조였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부터 옆 팀장과 바로 아래 직원의 크고 작은 언쟁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동안 내가 고향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나? 여기 사람들이 참 화가 많네...'라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했다.
하긴 우리 부모님도 평생 싸우면서 수십 년을 살아오셨고 사이좋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어 그다지 낯선 상황도 아니었다.
이곳에 와서 흥미로웠던 것은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조차 웬만큼은 나에게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팀장님! 전에 OO센터에서 일하셨죠?"
"네? 어떻게 아세요?"
"저는 다 알고 있죠"
일 때문에 처음 만나게 된 업계 관계자는 나의 지난 경력을 알고 있다고 얘기하며 의미심장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뭔가 찜찜한 기분에 나중에 함께 동석했던 팀원에게 그에 대해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그는 내가 입사한 팀장 자리가 본인 자리라며 떠들고 다녔던 자칭 내정자라고 했다.
소문에 따르면, 어쩔 수 없이 그를 수용해야 했던 회사 관계자들은 정규직 자리를 2년짜리 계약직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비정규직으로 바뀐 팀장직과 공정함을 요하는 필기시험 과정 등을 탐탁지 않게 여겨 내가 어부지리로 채용이 된 것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모두들 내가 오기 전에 그 '내정자 대신 누가 채용됐는지?'가 한동안 이슈였다고 했다.
자칭 내정자를 제치고 갑자기 공채로 들어온 나의 주요 경력들을 듣고는 왜 이 지방까지 내려왔는지 다들 의아해했다고 했다.
처음엔 다들 깎듯이 서울말을 쓰는 나를 경계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아마도 조금 있다 떠나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되면 내 고향과 출신 학교를 밝히면서 친근감을 쌓아가고자 노력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직속 상사나 동료팀장들은 내가 일하는 방식과 과거의 경력을 높이 사며 격려해 주었다.
좁은 지방 도시라 그런지, 과거 학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학연과 지연의 고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대학을 휴학하고 고향의 한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했던 내 경력까지 얽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지역 문화 기관의 업무가 나름 잘 맞았고, 예전에 예술을 배우고 싶어서 고향을 떠났던 그곳에 내가 다시 돌아와 작은 일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꼈다.
가장 좋았던 것은 내가 주말 출근이나 다른 팀에서 하는 행사에 아이들이나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구경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도시였으면 나 홀로 좋은 문화예술을 경험하며 아쉬워했을 테지만 고향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가족들과 함께 즐기며, 교감할 수 있었다.
특히, 부모님은 집을 떠난 딸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자랑스러워하셨다. 내가 이혼한 직후 한동안, 엄마는 남의 자식 자랑을 들어야 하는 친구들이나 친척들의 만남을 꺼려하셨다. 하지만 가끔 고향 언론에 나온 딸의 기사들을 지인들에게 퍼다 나르며 그때의 서러움을 조금이나마 회복하시는 듯했다.
특히, 부모님은 집을 떠난 딸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자랑스러워하셨다.
내가 이혼한 직후 한동안, 엄마는 남의 자식 자랑을 들어야 하는 친구들이나 친척들의 만남을 꺼려하셨다. 하지만 가끔 고향 언론에 나온 딸의 기사들을 지인들에게 퍼다 나르며 그때의 서러움을 조금이나마 회복하시는 듯했다.
고향에서 내 삶은 나름 평안하게 잘 적응하는 듯했다. 하지만... 가끔 내 마음을 조여오는 게 있었다.
새로운 이직한 회사에서는 남편이나 자녀들이 있는 경우 가족수당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같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수당도 받지 못했다. 이를 아는 몇몇 동료들은 내가 늘 행사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왜 가족수당 청구를 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을 갖는 듯했다.
처음엔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사람들이 “남편은 뭐해요?‘라는 질문을 할 때 뭐라고 답을 할지 고민스러웠다.
야근이나 주말에 근무를 할 때마다 “애는 누가 봐요?”라는 말이 스트레스였다.
심지어 회식자리에서 술에 취한 팀원이 "직원들끼리 팀장님이 이혼하셨다는 얘기까지 돌았어요. 왜냐하면 도저히 가정도 있고 애들도 있는 사람이 저렇게 저녁이고 주말이고 열심히 일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구요."
바로 정면에서 농담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답을 해야할지 몰랐다.
'도대체 왜 여기 사람들은 내 결혼 상태가 궁금한거야!!'
처음에는 시니컬하게 나의 이혼에 대해 쉽게 언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혼 여부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쉽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사람들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