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10년 #34
대학교를 졸업한 후, 한 예술단에 배우로 취직한 나는 처음 두 달 치의 급여를 받은 후, 임금체불에 시달렸다. 한편의 공연을 완성하겠다는 의지로 함께한 예술단원들 댄스 강사, 태권도 사범 등 각자의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합숙 생활을 이어갔다.
시간이 갈수록 단원들은 하나둘씩 떠나갔고, 나또한 여섯 달을 겨우 버틴 후 결국 TV 속에서 본 뮤지컬 공연장에서 인턴사원으로 이직을 했다.
인턴사원으로 받기로 했던 80만원이 찍힌 내 통장을 보게 된다면...내가 힘들게 버텨왔던 지난 한달이 꼭 80만원짜리가 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 일을 중간에 돈 때문에 쉽게 포기해버릴까봐 나는 통장을 보지 않기로했다.
덕분에 4년 뒤에는 아버지의 도움을 조금 받아 서울 강남에 전세 원룸을 구할 정도의 돈을 모으게 되었다.
결국 결혼할 때는 그 전세금으로 꼭 필요한 혼수만 마련하고, 나머지는 모두 신혼집 전세를 구하는데 보탰다.
방이 두 개였던 집에 갑자기 나 홀로 살게 되니 퇴근할 때마다 많이 외로웠다.
훗날 서울 전세집을 빼고 고향의 저렴한 아파트를 구해서 사는 동안, 마침 대학교 친구가 자신의 회사에 돈을 빌려주면 높은 이자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제법 모아두었던 목돈을 빌려주고 대신 매달 이자를 받았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으나, 친구는 매달 약속대로 높은 이자를 입금해주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공연기획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이제는 일하는 법을 제대로 익혀서인지 나는 무료한 회사 생활과 함께 재테크 공부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전남편은 오직 싼 집값때문에 고향 외곽에 있는 신도시로 이사를 했다고 말했었다. 나름 한적하고 깔끔한 그 신도시가 나도 마음에 들어서, 인근의 저렴한 신축 아파트를 충동적으로 사버렸다. 집을 그렇게 빨리 살 계획은 없었으나, 현관부터 들려오던 평화로운 찬양 기타 소리와 마음씨 좋은 주인부부에 이끌려 계약하게 되었다. 당시, 대학 친구 회사에 내 목돈을 맡겨 놓은 상태라서 그 아파트 잔금을 치르기 위해서는 내 생애 '첫 디딤돌 대출'을 받아야 했다. 주택 매매에 있어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대출이 언제 나올지? 잔금 날짜에 맞출 수 있을지? 등등이 걱정되어 밤잠을 설치며 열심히 기도를 했다.
다행히 제때 제값을 치른 그 집은 매월 제법 큰 금액의 월세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던 중, 거금을 빌려줬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회사일 잘되지 않아 원금만 겨우 돌려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미 아파트 대출을 실행한터라 갑작스레 받은 거금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당시 이자가 매우 낮았기에 주식 외에는 답이 없었다. 코로나19의 충격으로 대한민국 주식 시장은 나날이 엄청난 폭락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 나는 주식을 공부 해가면서, 조금씩 투자를 했다.
그 후, 나는 어느 순간부터 지루한 회사 일보다 주식에 더 열중하게 되었다. 나름 괜찮은 수익률을 기록하면서 나는 친구한테 받은 모든 자금을 주식시장에 넣게 되었다.
겁없이 주식트레이더로 직업을 바꿔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