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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보라 Dec 25. 2024

#35. 인생의 우선순위

이혼 후 10년 #35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엄마가 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다.

한창 보험설계사 붐이 일었던 시절, 엄마는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아빠에게 끌려 나왔다.

아빠는 아이들이 셋이나 되는 집에 엄마가 항상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는지, 엄마가 일하는 것을 극도로 반대하셨다.

그때부터 엄마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소일거리로 주식이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지금 엄마가 70세이 된 지금까지도 주식 투자를 계속 하고 계신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엔 옹기종기 모여앉아 주식장의 화면으로 주가를 확인하고 거래했다면, 지금은 내 가르쳐드린 휴대폰 증권앱으로 주식을 사고파시는 거다.


한때는 제법 수익이 날 때도 있어서 거실 TV 등을 바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엄마는 매일 주식 장의 흐름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매일 가슴을 졸이며, 돈에 쪼들리셨던 것 같다.

심지어 내가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는, 갑작스러운 IMF의 타격으로 자취방 월세조차 보내지 못하셨다.

"우리 아빠는 학교 선생님인데 도대체 IMF라고 생활비를 왜 못 보내 준다는 거야!"

나는 갑작스럽게 비슷한 어려움을 겪게 된 친구들과 호프집, 삼겹살집,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결국 휴학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엄마를 원망했던 내가, 이제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주가를 확인하고, 사고팔기를 반복하고 있다.

엄마처럼 세상의 뉴스에 들썩이는 주식시장의 흐름을 좇으며, 가슴을 졸이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막 내가 주식을 시작했던 시기는 코로나19의 여파로 모든 기업들의 주식가치가 급락했었다. 덕분에 내가 산 주식들은 오를 수밖에 없었지만, 만약 일반적인 시장 상황에서 매일 사고팔기를 반복했다면 아마 큰 손해를 봤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나는 무료한 고향에서 새로 시작한 주식 투자를 통해 삶의 활력을 얻고 있었다. 동시에, 2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나의 팀장자리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다행히 나를 채용했던 대표이사와 인사관계자들은 나를 업무 성과를 높이 평가해, 나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노동조합원들의 반발에 부딪혀 나의 고용문제가 노사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의 유무에 따라 팀원들에게는 자신들이 올라갈 수 있는 승진 자리가 하나 줄어드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규로 지역문화기관이 설립된다는 기사를 접했다. 3년 만에 겨우 허가를 받게되어, 조만간 대거 신규 인력을 채용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나는 노동조합원들의 반발로 나의 정규직 전환을 망설이는 회사 대표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표님... 신규로 생기는 문화기관에 시험 준비를 한번 해볼까요? 아니면 좀 더 기다려볼까요?"

그는 직원들의 압박에 많이 지쳤는지, 나에게 할 수만 있다면, 이직을 준비를 해보라고 했다.


지금까지 정규직으로 채용 전환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던 대표가 이직 준비를 하라고 하니 앞이 암담했다. 노조위원장으로 사측과 협상을 벌이던 직원은 입사 첫날부터 옆 팀장과 언성을 높이던 문제 직원이었다.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대화가 되지 않는 상대였기에 나 역시 엮이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주식에 매진하며 인생의 즐거움을 찾게 되는 무료한 업무보다는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하는 새로운 일을 찾고 싶었다.


결국 나는 새로운 지역, 새 기관의 정규직 팀장 자리를 얻기 위해 입사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이직 결심 후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갖고 있던 모든 주식을 처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현금화한 돈으로 중도상환수수료를 포함한 아파트 대출금 전부를 갚아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자본의 극대화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 내 인생의 우선순위는 '이직'이었다.

그래서 온전히 시험 준비에 매진하기 위해 다른 잡다한 일들은 다 버리기로 했다.

당장 눈 앞에 얻을 수 있는 몇푼의 수익보다는 아이들을 고향에서 지속적으로 돌볼 수 있는, 정년을 보장해 줄 정규직이 더 시급했다.

1년 간의 짧은 투자 끝에 나는 2천만 원의 수익을 얻었고, 그 후로는 다시 주식투자를 하지 않았다.

대신, 주말마다 새로 입사 시험을 치러야 하는 지역의 문화자원과 축제 등을 조사하기 위해 아이들과 곳곳을 다니며 지역을 탐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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