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어쨌든 해피엔딩
이혼 후 10년 #36
이직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신생 문화 기관의 설립은 생각보다 더뎌졌고, 동시에 직원 채용 공고도 많이 늦어졌다.
주말마다 아이들과 지역문화를 조사한 지 거의 6개월 만에 관리자 채용공고가 먼저 났다. 전국인재채용과 지역인재채용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나는 이사 온 지 3년이 되지 않아 전국에서 온 수십 명의 지원자들과 경쟁해야 했다.
그 도시는 다행히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 자주 방문했던 익숙한 곳이었다. 최근엔 아이들과 수개월째 다양한 지역 문화 행사를 방문한 덕에 새로운 문화기관에서 꼭 필요한 신규 문화사업을 제안할 수 있었다. 면접때 나의 이직 사유 등에 대해 여러 심사위원들이 날카로운 질문을 했지만 나는 당당히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결과 공고가 나고 얼마 뒤 직속 상사가 면담을 요청해 왔다. 입사 초, 나에게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동문이라고 밝히며 학연을 강조했던 그녀는 지역에서 계속 밥벌이를 하고 싶으면 사람들에게 내 이혼 사실을 함구하라는 살벌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었다.
"축하해! 너무 잘됐다.... 여기서 시끄러운 직원들이랑 기싸움하느니 새로운 곳에서 원년멤버로 새 출발 하는 게 훨씬 낫지. 그럼 그쪽 출근은 언제부터 하는 거야?"
대화의 시작은 친근했으나 사실 나의 퇴사 일정을 알고 싶은 듯 했다.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최대한 빨리 또다른 계약직 팀장을 뽑을 수 있도록 말이다.
상사의 은근한 독촉에 나는 새로 가기로 한 기관의 인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출근 날짜는 언제로 생각하고 준비하면 될까요?"
"아직 사무실 공사가 덜 진행돼서 정확한 날짜를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출근 날짜가 확정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엄연히 지방자치단체 산하 기관이었기에 채용이 번복될 일은 없었지만, 문제는 기존에 다니던 회사에 언제 공식적으로 사직 의사를 통보할 수 있느냐였다.
목소리가 한결 냉정해진 상사는 나를 다시 불러 이렇게 다그쳤다.
"거기에 합격했다는 걸 우리 직원들이랑 이 업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도대체 사직서는 언제 제출할 거야? 우리도 다음 채용준비를 해야 되는데 사직서 없이는 다음 채용 승인을 받을 수가 없어!"
나는 당황하지 않고 아직 첫 출근 날짜가 미정이라 아직 퇴직날짜를 결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지금껏 단 하루도 고용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날이 없었던 나였기에 입사날짜가 미정인 상태에서 사직서 제출은 너무 불안했다.
내가 열심히 이직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나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했던 그 말 많던 노조위원장은 대표이사와 어떤 협상을 했는지 공무원팀장이 떠난 자리에 직무대행으로 발령이 났다.
나의 정규직 전환을 좌절시킨 덕에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그는 나를 불러 사직서 제출을 종용했다.
엄연히 내 계약기간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인사관계자들이 나의 퇴사를 당연한 듯 종용하는 상황이 불편하고 또 불쾌했다.
내가 비록 합격은 했지만 새로운 기관의 입사 조건과 입사시기에 따라 얼마든지 이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어이없는 시간들을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중에 드디어 입사날짜가 정해졌다.
수습기간은 무려 2년!
2년간의 근무평정 결과에 따라 정규직 전환여부가 결정된다고 했다.
나와 함께 채용된 모든 신규관리자가 같은 조건으로 입사하게 되었기에 나름 안심하며 최종적으로 이직을 결정했다.
익숙한 듯 낯선...고향으로 화려한 복귀를 할 수 있게 해 줬던 세 번째 회사와의 이별을 준비했다. 지역 문화기관 일을 하면서 많은 도움을 줬던 우리 팀원들과는 나름 정도 많이 들었다. 함께 한 팀원들과 조촐한 점심식사를 하고 꽃다발 한아름을 받아 들고 회사를 나섰다.
그리고... 언제 다시, 어디서, 어떤 얼굴로 만날지 모르기에 섭섭했던 일은 마음속에 넣어두고, 모든 직원들의 책상에 작은 선물을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하마터면 씁쓸할 뻔했던 이별을 어쨌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