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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보라 Nov 12. 2024

이혼 후 10년 #5 내 두발이 묶인듯..서럽게 울었다

이혼 후 10년 #5

대형 공연의 셋업 시즌이 시작되면 아침 8시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출근지는 사무실이 있는 역삼동을 중심으로, 공연 대관 스케줄에 따라 서울 전역의 주요 공연장과 전국의 문화회관이었다.

나는 무대 일을 시작한 후로, 누군가 업무나 새로운 기회를 줄 때 거절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부터 업무로 주어진 책 번역을 꾸준히 했고, 몇 년 후에는 내 이름으로 출판까지 할 수 있었다. 이후로는 후배들을 가르칠 기회가 하나둘 생겨나면서, 내 일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며칠 전부터 속이 메스껍고 불편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사를 받았는데...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계획되어 있는 해외 유명 공연들이 아른거렸다. 10년을 버텨온 끝에 그토록 바라던 작품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몇 달 후면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아기를 보며 집에 있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마 아이가 태어나면 더 이상은 주말 아침마다 혼자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이제 내 몸은 나만의 것이 아니며, 또 하나의 생명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신혼집은 남편 직장에서 15분, 일터에서는 1시간 거리였다. 나도 주거비에 일조했지만, 결국 시어머니 의견을 따라 집을 구했다.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질수록 날씨는 점점 추워졌고,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며 힘겹게 출근하는 길은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언제까지 일하러 다닐 거냐? 얼마나 번다고 그 배를 하고 독하게 출근하는 거냐?”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출근길 1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 틈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시어머니의 전화는 내 마음을 더 무겁게 짓눌렀다. 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뎌왔는데, 이제 막 ‘가족’이 된 이들이 나의 지난 시간과 노력을 부질없이 취급하는 것에  화가 났다. 때때로 이런 상황을 만든 뱃속의 아이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출산이 임박한 무렵에도 나는 여전히 대형 뮤지컬의 감독을 맡고 있었다. 무대 위와 분장실을 오르내리며 하루 12시간씩 일했고, 예정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통증이 느껴지면 분장실 한쪽 소파에 몸을 눕히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겨우 버텼다. 출산 후에는 최대한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바로 복귀하고 싶어 출산 휴가 일정도 뒤로 미뤘다. 출산 예정일 5일 전까지 전과 다름없이 일하고, 3개월 후에는  이 자리에 돌아오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버텼다.


드디어 출산 휴가 전날, 오늘만 지나면 가면 꽤 오랫동안 쉰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직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마침 걸려온 시어머니의 전화... 출산 전 내 얼굴도 볼 겸 오늘 서울 집에 올라오신다고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집으로 달려간 나는 분주하게 집안을 정리며 시어머니를 맞았다.     


그날 새벽, 갑자기 몸속에서 축축한 것이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놀란 마음을 다잡고 자는 남편을 깨워 병원에 가자고 했다. 인터넷에서 미리 배운 대로 차분히 준비물을 챙기며, 입원하기 전, 병원 앞 편의점에 들러 샌드위치와 바나나우유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단 병원에 들어가면 출산 전까지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급했던 내 마음과 달리... 병원에서는 진통이 일정한 주기로 반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하얀 커튼 사이로 보이는 시계만 쳐다보며 이를 꽉 물며 12시간 가까운 진통을 견뎠다. 마침내 진통 간격이 짧아졌음 느끼고 급하게 의사를 불렀다.  


"산모 몸속에 양수가 얼마 남지 않아 수술을 해야 합니다."

내가 이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데... 다급해진 나는 의사에게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저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요! 절대 수술은 하고 싶지 않아요!”

냉정을 잃지 않은 의사는 “산모는 괜찮아도 아이는 괜찮지 않아요.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아이가 위험해질 수 있어요!”라며 나를 설득했다.     


의사의 긴 설명 후, 내 몸은 서서히 마취로 잠에 들었다.

희미한 정신이 깨어났을 때, 하얀 천장 위로 비치는 강한 불빛과 복부의 강한 통증이 나를 덮쳐왔다.


누운 채로 힘겹게 만난 내  아기는...

2.68킬로의 작고 까만 남자아기였다.

막달까지 내가 바쁘게 사느라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그는 너무 작고 야위어 보였다.

아기는 내 품이 불편한 듯, 없는 힘을 짜내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울어댔고 나는 아기를 만난 기쁨보다는 오랜 진통 끝에 결국 제왕절개를 해야 했던 허탈함과 찌르는 듯한 복부 통증에 함께 울어버렸다.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나의 길, 그 길 위에서 만난 작고 새로운 생명체로 인해 내 두발이 묶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밤은 아주 서럽게... 더 깊이 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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