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대한 전 생애의 투쟁
내 몸에 대한 이야기는 승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체중 감량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에세이가 아니다. 날씬해진 내가 과거 뚱뚱했던 시절 입었던 거대한 청바지의 다리 한쪽에 들어가 있는 사진이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동기부여를 해주는 책도 아니다. (중략) 말하자면 내 이야기는 성공담이 아니다. 그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만 해두자. p14
이 책을 쓰는 건 고백을 한다는 것이다. 나의 가장 추하고, 가장 연약하고, 가장 꾸며지지 않은 부분을 드러내겠다는 말이다. 나에겐 이런 진실이 있다고 털어놓는 일이다. p15
책 록산게이의 '헝거'는 밀리의 서재 공식유튜브에서 '인문 편집자 선정, 깊은 통찰을 원한다면 필수로 읽어야 할 인문 서적' 영상을 보고 알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k3XmuiCj04) 잔인하고 처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이 책이 재밌다고 간단하게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강렬하고 가치 있는 책이라고 느꼈다.
이름이 록산게이라고? 출신을 짐작하기 힘든 생소한 이름인데 그녀는 아이티계 미국인으로 뉴욕타임스, 가디언 등에 칼럼을 기고하는 칼럼니스트이자 헝거, 나쁜 페미니스트 등을 집필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퍼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영향력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열두 살 때 동네 남자아이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했다. 그 이후 그녀의 전 생애는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점철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대한 수치심,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먹게 되고 초고도비만의 몸이 된다. 성범죄 트라우마가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부서뜨리는지 처절한 진실을 보여주고 책을 덮을 때쯤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보게 된다. 이 책은 현재 50대인 74년생 록산게이의 자전적인 수필이고 그렇기에 '더 글로리' 같은 통쾌한 엔딩은 없다. 내심 그러한 결말을 기대하며 읽었다. 80% 다 읽어가는데 영화나 소설이라면 슬슬 주인공이 어려움을 극복하거나 악인들이 처단되는 결말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 책은 현실이기에 끝까지 처절해서 마음이 아팠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친구는 비행기에서 먹으라고 감자칩 한 봉지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거부했다. 내가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은 공공장소에서 그런 음식 먹는 거 아니야."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한 말 중에서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우리 우정의 깊이 덕분에 그런 고백까지 할 수 있었는데 (중략) p177
TV에서 나를 본 특정 부류의 사람들은 귀한 시간을 내어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거나 트위터로 멘션을 보낸다. 내가 뚱뚱하거나 못생겼다고 말하려고, 아니면 내가 뚱뚱한 데다 못생기기까지 했다는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말이다. (중략) 가끔 구글 알리미를 따라가 보면 남성 인권 운동 게시판의 유저들이나 보수 멍청이들이 행사나 잡지의 내 사진을 놓고 내 외모를 비웃으며 참으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중략) 나는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어야만 한다. 그렇게 살다 죽으라고 내버려 두고 신경 쓰지 말아야만 하고, 이런 저열한 짓거리를 일삼는 저급한 부류에게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걸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 싫어하는 건 본인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P313
자신과 관련 없는 타인을 쉽게 비방하는 사람이 정말 싫어하는 건 본인 자신이라는 말. 유독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열등감, 수치심과 같은 약한 부분을 건드는 것이 아닐까? 이런 자신을 마주하거나 바꾸거나 나아지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 그럴 듯 한 잣대를 가지고 타인을 비난하고 즐긴다. 록산은 우리의 내심을 들여다보게 한다.
모든 조건은 고려해 보았을 때 나에게는 어느 정도 자존감이 있다. 나와 잘 맞는 사람들 주변에 있을 때 나는 스스로 강하고 유능하고 섹시하다고 느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예상만큼 겁 없고 용감하지는 않지만, 두려워하면서도 기꺼이 모험에 뛰어들고 나 자신의 그런 점 또한 마음에 든다. p186~187
이 책에 중반부를 넘어서 겨우겨우 한번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놀랍게도 내가 이 책을 읽기 전 유튜브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정과 같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ZarrJDdnp4U&t=607s) 어쩌면 타인은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좋게 보고 있을지도. 자신에게 가장 야박한 것은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의 후반에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발언이 또 겨우겨우 두 번째로 나온다. 366페이지 중에 고작 두 번 나온다. 어찌 되었던 두 번째 긍정적인 발언이 등장했을 때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으며 새벽 두 시였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이역만리타국에 있는 한 아시안걸이 그대를 이렇게 지지한다.
'구의 증명'의 소설가 최진영 씨가 괜찮다는 말을 건네는 책은 아니지만 다 읽고 나면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라고 서평을 썼는데 그 말에 무척 동감한다. 그 어떤 것도 사람의 존엄을 훼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가해자는 잘 살고 있고, 그녀는 평생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그녀의 영광을 볼 수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