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쉬어지는 하루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에 대한 압박을 주지 않으려 했다.
공부는 견뎌야 할 일이 아니라
놀이처럼 만날 수 있는 것이라 느끼길 바랐다.
학교에 보내며 늘 건네던 인사는
“잘 놀다 와!”였다.
아이들은 공부의 벽 없이 학교를 다녔다.
시험을 앞두고도 크게 불안해하지 않았고,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공기의 온도가 달라졌다.
선행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갔고,
속도와 비교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 무렵 집안의 경제적인 상황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이에게 예전처럼 말하지 못했다.
“그냥 즐겁게 다녀.”
학원비는 가볍지 않았고,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께도
그 말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급해졌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되돌릴 수 없는 건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쉼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조금 늦어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은 숨을 고르는 시간 아닐까.
나는 그 두 마음 사이에서
자주 흔들렸다.
그 무렵, 나는 한 그림책을 만났다.
《바닷가 아뜰리에》.
그 책 속 아이는
무엇이 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바닷가의 바람을 맞으며
시간이 흐르는 대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다가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도
저런 하루였다는 것을.
성취로 채워진 하루가 아니라
숨이 쉬어지는 하루.
속도가 아니라 감각이 살아 있는 시간.
그때의 나는
그 시간을 만들 용기가 없었다.
내 안의 불안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남편 사업의 전환,
아이들의 성장,
나의 진로에 대한 막연함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림책 공부를 하며,
나는 그림책을 ‘읽는 법’보다
‘머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답을 찾지 않아도 되는 시간,
각자의 이야기가 흘러가도 괜찮은 자리.
내가 무언가를 배우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아이들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지금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었다.
모든 학원을 내려놓은 것은 아니지만
각자 필요한 것만 남겼다.
둘째는 수학과 미술을,
큰아이는 우쿨렐레를 다닌다.
아이들은 유치원 시절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잠도 충분히 잔다.
가끔은
이렇게 보내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하지만 또 마음 한편에서는
이때 아니면 언제 이런 시간을 살아 보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곁에서
나 역시 숨이 쉬어지는 삶을 배워 가고 있다.
아이들이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아이들보다
부모에게 쉼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곁을 둘러보면
쉬지 못하는 어른들이 많다.
책임감이 강한 남편은
늘 다음을 준비하고 있고,
양가 부모님들은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살아오셨다.
이제는 당신들을 위한 시간을 보내셔도 될 텐데
몸은 여전히 쉼 없이 움직인다.
많은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미래를 놓칠까 봐,
부모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에,
자신이 지쳐 있는지도 모른 채
계속 앞으로 달려간다.
그 긴장은
결국 아이들에게 전해진다.
말로는 “괜찮아”라고 하지만
몸은 바쁘고, 마음은 조급하다.
아이들은 그 기류를 정확히 읽는다.
아이들에게 쉼을 말하기 전에
어른들에게도 쉼이 필요하다.
숨을 고르는 부모 곁에서
아이도 숨을 고를 수 있다.
《바닷가 아뜰리에》의 파란 풍경은
아이만을 위한 장면이 아니라
어른에게도 열려 있는 풍경이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애써 왔다.
이제는 잠시 앉아
바람을 느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