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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 the 하트히터 Sep 15. 2020

고통은 '고급스러운 통찰'이다

feat. 다시 시작하는 법

인생은 고통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세상과 나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바뀌었다. 그중 하나는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얼핏 부정적이고 회의적으로 보이지만 이 말의 본질을 이해하면 오히려 그 안에 희망이 있는 말이다. 우리 삶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은 계속된다. 인간은 '종결 욕구'란 것이 있기에 어느 하나의 업을 끝내거나 달성하고 나면 그 상태가 그대로 쭉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가 기대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기대와 현실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고통은 커진다. 특히 내 모든 것을 '갈아 넣은' 각고의 시간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러한 고통을 딛고 다시 일어서고, 누군가는 그대로 멈춰버린다.







다시 시작하는 법


닷새째쯤 되는 날 아침, 눈을 뜨니 커튼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스며들어 어두침침한 벽에 가느다란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호기심이 일었다. 잃어버린 논문과는 상관없이 사람이 닷새 동안 먹지 않고 누워 있으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지금의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지러움을 참고 일어나 침대 발치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에 창백한 유령 같은 모습이 나타났다.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내 속 깊숙이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이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껏해야 논문인데 뭐. 그래, 살아 있잖아....... 논문 따위쯤이야.'

-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19p


1984년 미국 유학 시절, 장영희 교수는 2년 여간 공들여 준비한 논문을 도둑 맞고 만다. 그 충격이 너무나 컸던 탓에 기숙사로 돌아와 방문을 을 잠그고 전화도 받지도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사흘 밤낮을 지낸다. 그러다 닷새가 되는 날, 문득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후, 내면에서 속삭이는 희망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지도교수의 격려와 지원을 받아 1년 후 다시 논을 완성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인생이 짧다지만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1년은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장영희 교수는 소아마비로 인해 평생을 목발에 의지하고 세 차례에 걸친 암투병을 겪었다. 하지만 그녀의 글은 결코 무겁거나 우울하지 않다. 아픔을 대하는 솔직함과 특유의 위트에서 오히려 용기와 희망을 배울 수 있었다.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그녀가 '살아온 기적'이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기적'이 되어준다.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나쁜 생각이 있어도 3퍼센트의 좋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준다.

-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42p





고통, 고급스러운 통찰


나는 어떠한 고통스러운 상황이 발생하면 지금 이 상황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지 아니면 통제할 수 없는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면 고통이 클수록 막연한 불안과 절망감에 매몰되어 무력감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때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빠르게 포기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상황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해나갔을 때 비로소 고통은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고급스러운 통찰'이 되어준다.




사실 애써 저장한 서평이 어플 오류로 인해 모조리 날아가버렸다. 시간과 공을 들여 작성한 글이 저장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네트워크 연결이 좋지 않다는 무심한 알림 창과 함께 제목만 남고 안에 글은 모두 증발해버렸다. 순간 스마트폰을 집어던지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밀려왔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포기하고 때려치우든가, 다시 쓰든가. 늦은 새벽 나는 다시 글을 쓰는 것을 택했고 이렇게 다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탔을 때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페달을 밟는 것뿐이다. 그리고 누군가 페달을 밟는 게 힘들어 보인다면 손을 잡아주자. 장영희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절망과 희망은 늘 가까이에 있다는 것,
넘어져서 주저앉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일어나 걷는 건이 편하다는 것을 배웠다.

-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20p





*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장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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