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희 Oct 10. 2021

추억도 방울방울

영화 '추억은 방울 방울'


유튜브 금지령을 내리자 혜령이가 저녁식사 시간에 골라 놓은 영화는 '추억은 방울방울'이었다. 추억이 방울방울 달려 나오는 '추억 재생 영화'다. 어린 시절 나를 TV 앞에 붙들어 두던 만화계의 아이돌, 하이디와 앤 그리고 코난을 만나게 해 준 사람이 이 영화의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다. 그의 밝은 작품들을 좋아하지만 고등학생 때는 '반딧불의 묘'를 보며 펑펑 울기도 했다. '일본 색채가 강하다' , '희생자 코스프레를 그만 하라'는 등의 악평을 받기에 잘 권하지는 않지만 단연코 내겐 '반딧불의 묘'가 그의 대표작이었다. 올해에도 '이웃집 야마다 군'을 두세 번 보았으니 나는 40년 가까이 이 감독이 만든 작품들을 한 번씩 만나며 살아가고 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에치고유자와'. '행복했던 추억만큼 행복을 가로막는 것은 없다', 호리 다쓰오 '바람이 분다'의 가루이자와. '숲이 살아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로 시작하는 온다 리쿠 '흑과 다의 환상'의 야쿠시마까지. 사실 어떤 특정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책이 마음에 들면 '언젠가는' 하는 즐거운 희망고문이 하나씩 늘어난다. 영화도 그랬다. 벚꽃이 피는 4월이 되면 제목만으로도 설렘을 불러일으키는 '4월 이야기'의 무사시노 대학, 60만 송이 해바라기가 핀다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아케노 해바라기 밭처럼 가보지 못했기에 동경으로 남아 있는 도시들이 아직 많다.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영화 <비밀>에서 처음 조우한 설경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버스 사고가 일어나고 엄마가 죽으며 딸의 몸에 엄마의 영혼이 깃든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스토리도 무척 신선했고 배우들 연기도 어색하지 않았다. 영화의 시작 부분, 3m 이상의 눈벽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을 버스가 달린다. 4,5월이 아니면 만날 수 없다는 그 설경은 도무지 일본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이 환상적이었다. 일명 '다테야마 쿠로베 알펜루트'라고 불리는 곳. 눈이 어느 정도 녹아야 사람들이 그 절벽을 걸어서 지날 수 있기에 겨울이 아닌 봄에야 관광객들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이라 했다. 검색에 검색을 거듭하며 '환상'을 키웠지만 짧은 여정으로는 가 닿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잠깐의 여유가 생겨 2주간의 일본 여행을 계획하던 때는 가을의 끝무렵이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은 눈 절벽이었다. 눈 절벽을 볼 수 없을지라도 지금이 아니면 그곳에 갈 시간적 여유가 평생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조급함이 들었다. 설산이 아름다운 곳인데 단풍산은 어떨까 하고 기대에 부풀었다. 여행사 직원이 새 상품을 기획할 때처럼 꼼꼼한 일정표를 짜는 것이 취미이기도 했던 터라 열차시간과 숙소, 먹을 음식, 볼 것들과 예상 경비 등을 시간당 분류하여 정리해나갔다. 갑작스러운 여행이었지만 마음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영화들을 다운로드하고 가벼운 책을 몇 권 챙기고 필름을 사고 옷을 챙기며 떠날 준비를 마쳤다.


내 완벽한 일정표의 구멍은 외국인 전용의 열차 프리패스권 구입이었다. 숙소는 미리 예약이 가능했지만 열차는 일본에 도착하여 패스를 구입해야 예약이 가능했다. 출발 예정일이자 패스 개시일로 생각해 둔 날에 도야마행 신칸센은 전석 매진이었다. 이틀 간의 일정에 구멍이 생겼다. 짐을 풀고 서점을 찾아 나섰다. 여행잡지 코너로 가니 가을 풍경을 뽐내는 잡지들이 가판대에 쭉 나열되어 있었다. 천편일률적인 여행책자들은 패션쇼장의 옷같이 현란했다. 어디로 가볼까 심드렁하게 이 잡지 저 잡지 손을 대보는데 절벽 위에 새워진 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절벽 아래로 자연의 품에 안긴 소박한 마을이 자신의 가을빛을 수줍게 뽐내고 있었다.


 야마가타 야마데라(山寺). 신칸센을 타고 1시간 센다이까지 이동, 센잔센으로 갈아타고 1시간, 야마데라 역에서 걸어서 300m. 비교적 간단한 루트였다. 며칠 뒤 잡지를 손에 들고 센다이행 플랫폼에 섰다. 기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긴장감은 서서히 즉흥적인 여행이 주는 기쁨과 설렘으로 바뀌었고 의자에 편안히 몸을 맡길 수 있었다. 당시 핸드폰은 많은 영화를 다운로드할 수 있는 사양이 못되었기에 '이번 여행엔 이 한 편의 영화', 같은 느낌으로 신중하게 골랐다. '추억은 방울방울(おもいでぽろぽろ)', 의미를 가득 품고 있을 것과 같은 무게감 있는 단어 '추억'이 '방울방울 (뽀로뽀로 ぽろぽろ)'이라는 가볍고 경쾌한 일본어 발음과 만나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게 하는 제목이다. 점차 빨라지는 속도에 차창 풍경도 의미가 없어질 때 즈음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어린 시절 도쿄에서 자라 시골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27세 타에코는 10일간의 여름휴가를 얻어 언니의 시댁이 있는 시골로 떠난다. 타에코는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며 농사를 짓고 초등학교 시절을 추억한다. 영화는 12살의 타에코와 27세의 타에코를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생리도 옮는다고 피해 다니는 장면, 지저분한 친구를 저만 놀리지 않았는데도 자신만 악수를 거절당한 장면, 행인 1역을 맡아 맹연습하는 장면 등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과거 회상 부분도 무척 재밌지만 농사일에 대한 가치관,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성찰로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하는 장면들도 흐뭇했다. 리얼리티를 중요시하는 감독이 세밀한 작업으로 공을 들여 완성했다는 홍화 작업 과정과 소박한 듯 광활한 이중적인 자연풍경에도 빠져들며 그렇게 이 영화에 서서히 마음을 내주고야 말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뜻밖의 작은 우연 덕분이다. 타에코가 열차를 갈아타며 찾아가는 시골이 바로 아먀가타였다. 한 장의 사진에 이끌려 찾아가는 낯선 이름의 장소가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이었다. 돈 주고도 만들 수 없는 여행의 에피소드 하나를 덜컥 선물로 받은 것이다. '보통열차로 갈아탄 후 조금씩 줄어들던 사람들이 영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주위를 돌아보니 한 명도 남지 않았다. 타에코가 탄 열차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하루 분 낭만을 충분히 채웠다. 역에서 300m는 도착점이 아닌 시작점이었고 천 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는 여정이 뒤따랐지만 덕분에 잡지 사진 비슷한 풍경 사진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한 장 남았다.


 분수의 나눗셈 부분은 언제 보아도 명장면이다. 타에코는 분수의 나눗셈 시험에서 25점을 받아와 엄마에게  그 전 미술 시간에 불어 그리기를 너무 열심히 하느라 머리가  아팠다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엄마는 타에코의 언니에게 동생을 좀 가르쳐보라고 한다. 뒤집어서 곱하기만 하면 되는데 제일 쉬운 게 분수의 나눗셈이라고 타박하는 언니와 사과를 그리고 자르며 이해해보려는 타에코. '분수 나누기를 잘 푸는 사람은 나머지 인생도 잘 풀어나가는 것 같아요' 이런 명대사를 남기는 영화. 남들 푸는 방식으로 살아가긴 쉽지만 이해하려면 무척 어렵기만 한 삶. 어떻게 내 식으로 풀어나가야 하는지 과거를 회상하며 내일을 그리는 영화, '추억은 방울방울'.

 

 '비 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 어떤 것을 제일 좋아해?' 하는 물음에 나는 여전히 부끄러워지는데 그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령이는 대답을 들은 타에코가 둥둥 날아다니는 장면에서 폭소를 터뜨린다. 언젠가 어른이 된 혜령이와 야마가타행 기차에 다시 을 수 있을까?  '추억은 방울방울'을 함께 보며 어느 장면에서 미소가 지어질는지 딸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고 싶다. 천 개의 계단을 올라 인물이 주인공이 되는 풍경 사진을 새롭게 찍어야지. 동경하는 도시 리스트엔 없었지만 다시 가보고 싶은 곳으로 떠올리게 되는 곳, 야마가타를 방울방울 추억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사랑하는 생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