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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Feb 05. 2021

내가 사랑하는 생활

나는 피천득의 수필 '내가 사랑하는 생활'을 좋아한다.

나는 수필 듣기를 좋아한다. 오롯이 나에게만 속삭이는 듯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익숙한 구절이 흘러나오면 그만 목적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버스 벨을 누르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익숙한 이방인이 되어 한적한 겨울 거리를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여유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나는 좋아한다.     


나는 책상 아래 누워있기를 좋아한다. 거실엔 푹신한 카펫 위에 기다란 책상을 놓아두었다. 그 책상 아래 공간은 딸의 아지트다. 딸은 그 아래 들어가 누워서 ‘나 어디 있게?’ 숨바꼭질을 한다거나 무얼 하는지 꼼짝도 않고 혼자서 누워 뒹굴기도 하는 것이다. 한 날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도대체 저기 왜 들어가나 싶던 곳에 들어가 누워보았다. 따뜻해진 방바닥, 낮도 밤 같은 그곳. 굳이 책상 위 스탠드를 내려 읽던 책을 들고 누우면 어김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우리 혜령이가 누웠던 곳이네.’하며 애틋하게 손으로 쓸어보기도 하는 그 좁은 공간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여름 저녁,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길 지나기를 좋아한다. 굴뚝 없는 집들에서 저절로 퍼져 나오는 그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 지글지글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갈치구이 굽는 향은 장미향보다 매혹적이다. 잠깐 멈춰 서서 이 집은 찬이 무엇인가, 가족들과 둘러앉았으려나 하는 상상력을 발휘해보다가 동하는 시장기에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는 그 내음이 주는 안도감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무언가 부탁해오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현아, 현준이가 이모인 나에게 와서 필요한 물건을 조심스레 말해줄 때나 신년 연하장 문구를 수정해달라는 친구의 문자도 반갑다. 모르는 수학 문제를 고민하다 조심스레 물어오는 여학생의 카카오톡 알림 소리도 반갑다. 그들의 ‘고마워’란 한마디 말이나, ‘선생님과 둘만의 추억이에요.’라고 쓴 편지는 나를 귀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남에게 부탁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나를 대신해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게 해 주는 손길들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키 크고 날씬한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길을 좋아한다. 영축산 통도사 극락암 올라가는 길은 소나무 군락으로 인해 지극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목적지로 가는 한 걸음이 못내 아쉬운 짧다면 짧은 길이다. '사바세계를 무대로 멋지게 살아라.' 하셨던 극락암의 선승, 경봉스님의 가르침대로 극락을 앞에 두고 소나무 숲만 거닐다 돌아가도 충분할 듯싶다. 사색처이자 무념처, 극락과 사바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자연의 품 속에 귀의하는 그 경건함을 좋아한다.     


나는 시골집을 좋아한다. 남편이 자란 곳은 버스에 내려 20분은 족히 걸어야 나오는 산 밑의 집이다. 아침 눈뜨면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과 여름밤 풀벌레 소리가 시원하다. 소리의 주인공이 참새인지 까치인지 귀뚜라미인지 매미인지 묻는 것에 쉬이 질리지 않는다. 밭에 심어진 것이 들깨인지 참깨인지, 마늘인지 파인지 맞춰보는  수수께끼 놀음도 즐겁다. 꽃무릇, 광대나물, 붓꽃, 수국 등 여전히 낯선 이름들을 불러보며 집 주위를 한 바퀴 돌면 백만장자나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뚝 떨어져 나온 것 마냥 한 채 있던 시골집 주변에 갈 때마다 집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것이 섭섭하지만 기억하고 싶은 이름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그곳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빵이 완성되어 가는 시간을 좋아한다. 특히 반죽한 빵이 부풀어오는 것을 눈앞에 두고 보는 것을 즐긴다. 보고 있으면 더디기만 한 그 기다림의 순간을 지나 책 읽기에라도 몰두하면 녀석은 어느새 몸집이 두 배로 부풀어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부풀어 오르지 않을 때가 종종 있기에 자기 몫을 장하게 해 준 녀석이 늠름해 보이며 횡재한 기분이 든다. 밤에 한 반죽을 냉장고에 넣고 문을 닫는다. 아침을 고대하며 침대맡에 누워 머리끈을 풀면 하루의 노곤함이 술술 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의 길이를 체험할 수 있는 고소한 순간을 좋아한다.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나도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미워하지 않으며와 미워하지 아니하며의 차이를 느끼고, 몇몇 사람을 끔찍이란 표현에 전율이 이는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그리고 세 아이의 바깥이 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내가 늙고 아이들이 크면 같이 키 큰 나무숲을 도란도란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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