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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Sep 19. 2021

흔한 빵을 나누어 먹고 싶은 사람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말을 섞어 본 적도 없는 사람과 동거가 시작되었다. 일본어 학교는 도쿄 중심가에서 다소 떨어진 조용한 마을에 있었다. 내가 기숙사로 배정받은 곳은 다다미가 깔린 방 두 개, 부엌 겸 거실, 세면대가 분리된 화장실과 작은 욕탕이 있던 아파트였다. 돈을 더 낼수록 배정받는 아파트는 더 깨끗하고 넓어졌지만 역에서 제법 떨어져 조용하고, 사는데 불편함이 없었기에 3층짜리 아파트 마리노 하이츠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던 현대식 아파트의 기숙사에서는 모두 각방을 썼지만 마리노 하이츠에는 침대도 없는 방을 두 명이서 공유했다. 각 방에 두 명씩, 한 집에 네 명. 샤워시간에 암묵적인 합의가 필요하고 큰 볼일을 볼 때 나는 소리를 어찌 감춰볼 도리가 없는 곳. 지금은 참 난감한 일이겠다 싶지만 기숙사 생활을 배경으로 한 명랑소설을 읽고 자란 나는 이런 곳에서 인생의 여자 반쪽을 만나지는 않을까 하는 환상을 늘 품고 있었다.


 입학식이 있기 전 두 명의 룸메이트가 스쳐갔다. 세 번째로 옆에 이불을 편 그녀는 광주에서 온 동갑내기였다. 키가 크고 짙고 긴 검은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어 올린 모습은 예쁜 얼굴의 남학생 같았다. 하얀 얼굴과 달리 목소리가 우렁차고 씩씩해서 ‘환장 허제이’ 나 ‘너 뒈졌어’를 그 특유의 억양으로 말할 때면 익숙해진 뒤에도 움찔하며 놀랄 때가 있었다. 낯을 가리지 않고 털털한 그녀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남다른 배려심으로 무장하게 되는 나. 일본어 실력이 비슷하여 학교에서도 같은 반을 배정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물불 가리지 않고 친해졌다. 어느 것 하나 핑계 삼아 친해지지 않으면 낯선 이곳에서 생활하기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인지, 정해진 인연에 의해 끌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자매처럼 생활비를 합쳐 각자의 반찬이 우리의 반찬이 되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물과 불처럼 다른 점 또한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큼이나 짧은 시간이었다. 신문을 읽고 뉴스 듣기를 즐기던 일본어 전공자인 그녀와 드라마를 보느라 밤을 꼴딱 새우기 일쑤인 나. 항상 단어 선택에 예민하여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나와 군인이 되고 싶다던 무뚝뚝하고 당찬 그녀. 우리의 언어 표현의 간극 또한 컸다. 다정한 말투에 서툰 그녀가 무심히 툭툭 던지는 한마디 말에 나는 심란해질 때가 잦았다.


 ‘동거’란 누군가를 속속들이 알아보기에 무척이나 좋은 시스템이었다.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도 때론 낯설었다. 먹고 자는 것이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사람은 얼마나 작은 것에 치사해질 수 있는지를 고찰해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동거를 해보라 조언하고 싶을 정도다. 잠자리나 말투, 벗은 옷을 아무 데나 늘어놓는다든가, 욕실의 머리카락을 줍지 않는다든가 하는 사소한 습관들은 조금씩 알아가며 조율해 나갈 수 있었다. 오히려 우리 사이의 발목을 잡는 것은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것은 식성 차였다.


 나는 신라면에 고추까지 넣어야 하는 사람이었고 얼음이 가득 든 차가운 음료를 선호했다. 입이 델 정도로 뜨겁지 않으면 국을 먹지 않았고 마늘과 겨자와 고추냉이를 끼고 사는 자극파였다. 우리 둘의 성격과는 반대로 그녀는 담백파였다. 신라면은 입에 대지도 못했고 된장찌개에 넣는 고추도 꺼렸다. 뜨거운 것도 잘 먹지 못했다. 참기름과 파를 열렬히 사랑하는 나는 어느 요리든 아낌없이 그것들을 뿌리고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파를 가득 넣은 미역국을 끓이고 ‘미역국에 파라니, 미역과 파는 궁합이 안 맞대’란 말을 먼저 들어야 했을 때 뒤에 따라온 ‘고마워, 잘 먹을게’란 말은 들리지도 않고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의 맛 궁합은 그다지 잘 맞지 않았지만 둘 다 무척이나 좋아한 것이 바로 빵이었다. 당시 일본에 온 한국인들은 빵 때문에 살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 빵이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푼돈도 아쉬운 우리 경제 사정상 베이커리 빵들을 자주 구입해서 먹기엔 부담스러웠다. 그해 봄 마침 나는 빵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그곳 책임자이시던 할아버지가 그날 만든 빵 봉지를 몇 개씩 건네주곤 하셨다.


 두툼하게 썬 우유식빵을 그때 처음으로 맛보았다. 부드럽게 찢어서 한 입 먹고서는 둘이서 동시에 '우와~'하고 마주 보았다. 윗집과 나누어 먹고도 매일 집에 남는 빵을 처리하기 위해 빵 전용 미니오븐을 구입했다. 과일잼 대신 땅콩 잼과 버터를 구입하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으나 역시 땅콩 알갱이의 유무에서 서로의 취향이 갈렸다. 버터 바른 두 개의 빵을 나란히 놓고서 겉면이 노릇노릇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순간이나 바싹 구운 빵을 꺼낸 후 땅콩 잼이 스르르 녹는 것을 기다리는 순간이 참 좋았다. 그녀는 첫 아르바이트 비를 받은 날 알갱이가 가득 들어간 땅콩버터를 선물했다.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고소한 풍미가 코를 훅하고 자극했고 뒤이어 사각사각 알갱이 씹히는 식감이 뒤를 따랐다. 다소 퍽퍽한 식감이 느껴질 때 마시는 시원한 우유 한 모금은 또 어찌나 달았던가. 빵공장 아르바이트는 두어 달 만에 끝났지만 두툼한 식빵 위에 버터 녹는 고소한 향은 이별의 그날까지도 계속되었다.


 가끔 삐끼고 토라졌지만 매일 다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그만 방에서 밤새 불을 끄고 오해를 씻었다. 속삭임은 때때로 동틀 녘이 되어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함께 자전거를 타고 동네 골목을 누볐고 도쿄의 구석구석 발도장을 찍었다. 첫 지진에 깜짝 놀라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다 잠든 나를 위해 전원을 꺼주었고 머리만 대면 잠이 드는 그녀를 위해 나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오해를 불러오던 말 대신 ‘밥 잘 챙겨 먹어. 학교 다녀올게’ ‘오늘은 아르바이트가 늦어, 혼자 밥 먹어.’ 등의 말이 담긴 그녀의 포스트잇과 영원한 우정을 속삭이던 나의 편지들이 우리를 끈끈하게 이어주었다.


 예정된 1년이 순식간에 흘러 혼자 왔던 나리타공항에 둘이 섰다. 영원한 이별의 앞둔 연인처럼 눈물을 흘리며 부둥켜 안았다. 그 눈물이 무색하게 동거로 시작된 우리의 인연은 20년이 넘게 잘 이어져 오고 있다. 어느 날 그녀가 남편과 싸우고 홧김에 탄 부산행 버스 덕택에 나는 그녀의 선배인 어떤 남자를 만났고 그와 결혼을 했다. 해가 가며 가족들이 늘어나고 한숨도 기쁨도 함께 나눈다. 멀리 떨어져서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사이가 되면 무조건 그리움만 남는 것인지 단 한 번의 작은 감정 소모전도 없이 우리 관계는 평온하다. 모든 기억은 애틋하게만 그려진다. 그러면서 서서히 동거의 희비 중 ‘비(悲’)는 빼고 ‘희(喜’)만 존재했다고 착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적나라한 일기장을 한 번씩 펼쳐보지 않았다면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벌써 없었던 일로 잊히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지금껏 친구들과는 큰 다툼 없이 무난히 지내온 편이다. 그런 내게 이런 격한 희비를 안겨준 흔하지 않은 존재, 나의 동거인 그녀. 가끔 치즈케이크 같은 것을 서로 선물하곤 하지만 좀체 그 흔한 식빵을 함께 구워 먹을 시간은 흔하지 않다. 두툼하며 푹신한 식빵을 볼 때면 여전히 그녀가 자동적으로 떠오를 뿐이다. 새하얀 빵의 속살들은 솔직한 맨몸으로 누군가와 마주할 수밖에 없던 그때를 회상하게 한다. 결 따라 부드럽게 뜯어먹어도 바삭하게 구워 버터만 발라도 행복한 한 끼를 나눌 수 있었던 우리들. 그녀와 그 흔한 빵을 나누어 먹으며 밤새 추억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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