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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May 13. 2021

커피-너의 이름은

 

시골 가는 차 안이다. 하늘 경계선은 지역 경계선과 상관없이 비를 뿌려대다가 그치기를 반복한다. 보슬보슬 내리는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멍하게 앉아 있었다. 스런 풍경도 아니건만 비가 와서 그런가 차 창 밖 풍경에 쉬 질리지 않는다. 평소 네 시간 정도 걸리는 귀향길은 대체로 밤에 출발하는 여정이었다. 혜령이가 칭얼대고 보채는 것에 크게 질린 뒤로 잠자는 틈에 냅다 달리는 식이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밤에 출발하려 했다. 그러나 어젯밤 일이 늦게 끝서 어쩔 수 없이 침행이 되고 말았다. 멀미약도 챙기지 못했는데 속이 불편하다거나 지겹다며 보채지 않을까. 내심 불안했다. 앉은뱅이 작은 책상을 카시트 앞에 놓고 그림 그리기 도구들을 준비해주었다. 오늘 음악은 아빠의 선곡으로 하자하니 기분이 좋은지 흔쾌히 그러자 한다. 처음 들어보는 여자 가수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혜령이는 한 시간 넘게 색칠놀이에 푹 빠졌다. 창 밖 녹음에, 조용히 내리는 비에 흠뻑 취한다. 똑딱.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셔보는 보온병 커피. 은은한 커피 향은 여유의 향기요, 따뜻한 한 모금은 편안함의 맛이다.


가정의 달을 맞아 주말에 시부모님들을 찾아뵙고 왔다. 이번 달엔 남편 회사 일이 바빠서  언제 시간이 나게 될지 몰랐다. 안 와도 된다고 바쁜데 무얼 오냐고 배려하는 말씀을 들으니 사람 도리는 하고 살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남편을 좀 보채어 시동생 가족들 내려오는 주에 맞춰 일정을 짰다. 언니, 오빠만 있으면 절대 엄마를 찾지 않는 혜령이 덕분에 뒹굴며 책 한 권 뚝딱 읽었다. 과일이며 고기며 자식들 먹인다고 준비 많이 해 두신 어머님 덕분에 배불리 먹고 평소엔 자지 않던 낮잠도 곤히 잤다. 길은 막히지 않았고 운전해주는 남편 덕에 음악 듣고 티브이 보고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잘 흘렀다. 집에 돌아오니 그렇게 자고도 또 잠이 오는 게 신기하다 싶게 피곤이 몰려왔다. 짐도 대충 정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트렁크 가득 싸 주신 음식들 정리하고 세탁기 돌려 빨래 널었다. 더 이상 차서 넣을 자리가 없는 재활용품 통을 비우고 와서 설거지도 마무리했다. 숙제가 끝났다. 마음이 분주했던 지난주는 오늘 아침에 겨우 마무리된다. 그리고 마주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롤케이크 한 조각. 웰 컴 커피. 일상으로 돌아온 걸 환영해. 커피 한 잔이 그렇게 속삭인다.


알라딘 원두를 좋아한다. 커피 사는 척하며 책도 한 권 살짝 끼워넣기도 하고, 배송비 드는 가벼운 책 한 권 살 때 원두를 살짝 끼워넣기도 한다. 그 달의 새로운  원두를 사면 두 개 주는 스탬프를 네 개 받을 수 있다. 전에 마시고 만족했던 커피를 다시 장바구니에 넣는 경우는 별로 없다. 여행 장소도 가 본 곳보다 안 가본 곳을 선호한다. 책이나 영화도 다시 보기보다는 새 작품을 고르는 편이다. 좋아하는 맛의 익숙한 과자보다는 호기심 가득한 미지의 신상 과자에 손이 간다. 단지 새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름도 보지 않고 구입한 피를 병에 옮겨 담기도 전에 다 마셨다. 봉투를 버리려고 할 때에야 눈에 들어온  커피의 이름. '니카라과 라 라구나' 사실 첫 잔을 마실 때 인상이 강렬했다면 이름을 보았을 것이다. 너도 이름이 있었구나. 새 원두를 구입할 겸 인터넷에 접속해보았다. 그리고 소개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니카라과 라 라구나'란 이름에 정이 붙는다. 그러나 이 달의 새로운 커피가 벌써 나왔다. 손은 스탬프 네 개짜리 신상 커피로. 이번엔 인생 커피를 만날 수 있을까. 아직 몇 가지 부분에선 익숙함보다 호기심과 설렘으로 살아간다.


가까운 이에게 더 털어놓기 힘들어 혼자서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는 일이 가끔 생긴다. 시시콜콜 털어놓지 않아도 나의 그 기운이 어딘가에 부딪혀 그녀에게 전해졌던 걸까.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섬세한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던 날이 있다. 그날 친구가 시험에 잘 통과했다고 보낸 준 아이스커피 쿠폰. 그 날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이 일찍 끝났다. 해가 밝을 때 퇴근이라니. 여름이 아니고서는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날이다. 집에 그냥 들어가기 울적하여 동네를 천천히 한 바퀴 크게 돌았다. 그래도 갈 곳은 집뿐인 저녁, 터덜 터덜 언덕을 오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파트 정원 앞에 서서 저 멀리 산을 바라보며 혼자 섰다. 그곳에 꼼짝 않고 서서 귀는 쇼팽의 뱃노래에, 눈은 건너편 하늘에 맡기고 10분 동안 마음을 쉬었다.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집으로 향한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날 이후 벌써 시간이 일주일이나 흘렀다. 한낮의 출근길, 조금은 이른 시간. 커피를 한 잔 사서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옛 빨래터 자리에 마련된 휴식공간에 햇빛을 피해 자리를 잡았다. 다시 쇼팽의 뱃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준비했다. 노을 지는 저녁의 '뱃노래'와 한낮의 '뱃노래'는 이렇게 다른 음악이었던가. 시원한 바람에 다리도 마음도 쉬어가는 때, 메인이 되어주는 위로의 커피 한 잔. 오늘의 힘이다.

 

 진정한 불금은 역시 다음날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판가름 난다. 늦잠을 자도 좋을, 토요일을 앞둔 오늘 같은 밤이야 말로 밤을 불태우기 제격이다. 온다 리쿠 광팬인 나는 그녀의 작품 '꿀벌과 천둥'이 작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넥플릭스에도 왓챠에도 없는 그 영화를 겨우 찾아 다운로드에 성공. 금요일 밤의 영화 한 편. 우리식의 불금 장면으로 제일 익숙한 버전이다. 남편은 오징어를 굽고 라면을 하나 부수었다. 술을 한 잔 하려나 싶어 닭고기나 만두라도 에어 프라이기에 넣어 줄 요량으로 먹을래 물으니 반색한다. 전에 에어 프라이기에 넣은 닭고기가 맛이 없었다고 직접 튀겨봐야겠다고 기름을 꺼내 든다. 그럼 이왕 튀기는 김에 감자와 만두도 추가. 냉동실에서 금세 꺼낸 그 녀석들을 하나씩 튀겨내고 나니 주방은 사방이 튄 기름으로 가득했다. 시간은 10시를 훌쩍 넘고 뜬금없이 시작된 노동에 조금 지쳤다. 아, 술로 달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이 느끼함. 이럴 때 나를 위해 떠오르는 익숙한 이름. 얼음 동동 투 샷 아이스 아메리카노. 어렵사리 찾은 영화는 자막이 없다. 짧은 일본어 듣기 실력에 의지하여 본 영화는 소설에서 받은 그 느낌을 살려보려 애쓴 노력이 가상할 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튀김의 느끼함과 어설픈 영화 감상 시간, 2% 부족한 금의 분위기. 그 틈을 채우는 시원한 커피 한 모금. 피아노 음악 영화의 단골 샷. 두 주인공의 즉흥 피아노 연주. 월광과 달빛이 번갈아 흘러나오는 장면. 익숙하고 진부해도 어쩔 수 없이 좋다. 별 것 없는 평범한 밤일지라도, 매일 마시는 집 커피라도 어쩔 수 없이 좋다.



 아무리 일상의 습관 같은 것일지라도 커피 생각이 난다는 건 딱 그만큼의 여유는 있다는 증거. 일상의 스냅사진 한 장, 일기 같은 너의 이름은,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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