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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Feb 14. 2021

2월도 봄이다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라이너 쿤체

 며칠 전 2월이 시작되고 혜령이가 유치원에서 입춘방을 가져왔다. 한자로 적힌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색칠한 것이었다. 어떻게 잘라서 어느 위치에 붙이고 몇 시에 부쳐야 한다는 것 등을 자세히 알려주었지만 깜박 잊고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고 그대로 넣어 두었다. 두꺼운 점퍼에 모자까지 쓰고서 맞이하는 봄이라니. 만물의 기운이 새로이 움트는 입춘이라 하기에는 정월달은 앙상한 가지가 여전한 완연한 겨울이다.     


 명리학을 배울 때, 다소 의문이었던 점이 있다. 항상 계절의 시작은 내가 체감하는 것보다 빠르다는 것이었다. 새해의 기운이 시작되며 봄을 알리는 계절은 음력 1월이고 꽃이 활짝 피는 5월이 여름이라는 것이다. 작열하는 태양에 언제든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고 싶게 만드는 양력 8월이 가을의 시작이었다. 농사를 지어보지도 않고 도시에서만 자란 나는, 농경기에 맞춰진 절기라서 그런가, 조상들의 사계는 조금 급하게 오는군 하고 심드렁하게 받아들였다.     


 어린 시절, 나는 여름을 몹시 힘들어했다. 그래서였을까, 봄, 가을을 특별히 좋아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아 생활하기 쾌적하기도 했지만 봄과 가을이 주는 화려한 색의 이미지가 좋았다. 봄에는 꽃놀이, 가을에는 단풍놀이를 기다리며 여름과 겨울을 이겨냈다. 지금은 사계절이 다 좋지만 역시 하나만 고르라는 혜령이의 질문에는 진지하게 망설인다. 가을과 봄을 저울질하다 끝내 봄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봄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인생의 한 장면이 있다. 대학교 2학년 즈음인가, 지금도 우정을 자랑하는 친구들과 입담 좋은 인생 멘토 남자 선배 한 명과 갑자기 꽃놀이를 가자고 의기투합했다. 짝사랑하거나 짝사랑받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던 친구, 얼마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친구, 동행한 선배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친구. 청춘과 사랑이 손바닥과 손등처럼 함께이던 시절이었다. 하동 가는 버스 뒷좌석에 다섯이 나란히 앉아서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순진한 여학생들은 남자의 눈으로 본 솔로 탈출 예상 순위에 집중했다. 선배의 사랑의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이론에 심취했다. 메달권에도 들지 못한 나는 발끈했지만 떨어지는 벚꽃잎을 두 손가락으로 잡으면 그 해에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에 기대를 걸었다. 벚꽃 터널로 유명한 그 길을 걸으며 꽃잎을 잡아보려 세상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햇살 좋은 그 날, 벚꽃비 속에서 허리가 굽도록 웃었다. 스프링처럼 통통 튀던 인생의 봄날들을 즐기던 청춘들이 있었다.     


 설을 봄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 설빔은 대체로 봄옷이라 설에 입기 위해 잘 넣어두었던 옷을 끝내 입지 못해 아쉬웠다. 삼 일 전 아침 강풍에 ‘오늘이 올해 최고 추운 날이군.’하고 생각했다. 한 달 전 신정 연휴에 들렀을 때도 마당에 눈이 가득 쌓여있었는데 우리 우리 설날은 마당에 햇빛이 가득 찼다. 외투를 벗어도 될 만큼 포근한 날씨 덕분에 마당에 나와 혜령이와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논에도 잡초지만 푸릇한 입들이 제법 돋아나 있었다.

“저기 울음소리 들리니? 뭐 우는 소리게?”

새소리인 듯 아닌 듯 뭔가가 멀리서 아스라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정체를 알려주겠다며 따라오라는 소리에 우리는 집 뒤 밭을 지났다.     


 밭에는 소 키우는 농가의 특유한 냄새가 진동했다. 아버님이 소막에 있는 똥을 거둬 밭에 뿌리신 거름 내음이었다. 수확을 끝내고 겨울 동안 휴식을 취한 땅에 봄기운이 돌면 하우스에 키우는 고추 모종이 제자리를 찾아 이 곳에 올 것이다. 농한기에는 할 일 없이 한가한 줄만 알았지만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시어버지의 하루는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소 밥을 주시고 들어오셔서 한 잔, 다시 밭으로 나가 거름을 나르시고 또 한 잔, 나무 전지를 하시고 한 잔, 소막을 손보시고 한 잔. 그렇게 아버님 겨울 하루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밭을 지나 개울에 이르니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 저렇게 크게 우는데 왜 들리지 않았을까 의아해질 만큼 목청 좋은 소리다. 그렇게 떼창을 하는데도 가파른 높은 언덕에서 개울을 내려다보던 내게 녀석들의 정체가 파악되기까지는 잠깐 시간이 흘렀다. 겨울잠에서 깬 수 십 마리는 됨직한 개구리들이 개울 곳곳에서 되찾은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한 마리가 물속으로 풍덩 뛰어드니, 피아노 건반 내려가듯 일정한 간격으로 풍덩, 풍덩 뛰어들었다. 짝짓기를 하느라 하나가 된 두 마리를 축복이라도 하듯 삼부 합창 소리가 이어졌다.      


 겨울 모습은 완연한데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봄을 맞는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키 큰 풀들이 돋아나면 그늘에 묻히기에 일찍 피고 씨앗을 퍼트린다는 개불알꽃이 양지바른 곳에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밭의 시금치는 얼지 않아 맛이 좋았고 겨울을 보낸 양배추도 밭에서 여전히 싱싱했다. 앙상한 가지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복숭아나무, 싸리나무에 작은 봉오리가 맺혔다. 잎이 풍성한 동백나무는 ‘저는 준비되었습니다.’고 속삭였다.   

   

 그 옆에 철쭉은 늘 그 모습 그대로이고 나무수국의 가지는 투박했다. 수국은 봄에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굵고 곧으며 뻣뻣해 보이는 가지에 수북하고 탐스러운 보라색 꽃이 달린다니 믿기지 않을 모습이다. 봄에 다른 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꽃이 귀할 때 피어 존재를 빛내기 위해 겨울과 봄을 보낼 것이다. 아, 조상들은 ‘그때’의 기운을 어찌도 이리 세심하게 알았던 것일까.      


 우리는 숨바꼭질하는 봄을 찾아 동네 산책에 나섰다. 저 윗동네까지 천천히 걸으며 억새도 두세 개를 손에 꺾어 들었다. 장난기가 동한 혜령이는 잘 닦인 길이 아닌 논과 개울 사이의 좁은 길로 가보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평균대 위를 걷듯 한 발 한 발 떼어놓고 있는데, 저기 좀 보라며 남편이 개울 쪽을 가리켰다. 물이 말라 가는 개울 바닥에 시커먼 물체가 평형 다리를 하고 철퍼덕 엎어져 있었다. 먼저 본 혜령이가 ‘개구리 시체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 마리가 아닌 몇 마리나 되는 개구리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인(寅)월, 신축년 새해의 시작이다. 십이지지의 인(寅)은 봄이 되면서 땅 위로 솟구쳐 오르는 맹렬한 기운을 의미하여 용맹한 호랑이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 글자는 ‘조심할 인(夤)’ 자에서 따왔다. 봄이 온 줄 알고 미리 나온 성급한 개구리가 꽃샘추위에 유명을 달리한 것일까.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으니 성급하게 외투를 벗었다가는 감기에 고생할 수 있다는 자연의 경고인 것일까.      


 도시에 태어나 지금껏 살아가는 나는 자연현상으로는 꽃이 피는 것, 인간사로는 입학식, 신학기를 기준으로 봄이 왔음을 인식해왔다. 올해 우리 집에는 고등학생이 되는 현준이와 초등학생이 되는 혜령이가 입학식을 기다리고 있다. 집을 지을 때, 살고 싶은 자연과 마을을 정해 집터를 정하고 삶의 철학을 담아 설계를 마치면 뒷일은 진도가 빠르다했다. 시간은 많이 걸리나 표는 잘 나지 않는 작업이다. 아이들이 화려한 청춘의 봄뿐만 아니라 준비와 도약으로서의 봄도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미처 몰랐던, 조급하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지혜의 속도로 자신의 땅을 다져나가기를 바란다. 봉우리인 순간도 아름다운 봄의 순간임을 잊지말자. 자신의 때에 맞추어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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