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희 Oct 01. 2021

작은 웅덩이를 계속 만들어 주십시오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를 읽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은 낯설지 않을 것 같다. 2000년대 후반이 되자 이와이 슌지 감독이 이끈 감성 저격 일본 영화의 시대가 서서히 가고 일본 영화의 인기도 거품 사라지듯 서서히 꺼졌다. 그 아쉬움을 메우듯 1995년 ‘환상의 빛’을 시작으로 영화를 만들어 온 그는 한국에는 2010년대 초, 중반 즈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과장되지 않은 일상의 모습을 담담히 다루는 점이 여느 일본 영화와 비슷하게 느껴짐에도 그의 영화가 주는 힘은 여느 영화와 비슷하지는 않았다.


한 영화제의 수상 소감에서 밝힌 ‘가로막혀 있는 세상과 세상을 영화로 이어 가고 싶다’는 말은 특별하진 않았지만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말이었다. 그의 영화가 일상을 다룬 여타의 일본 영화와 다른 점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보았다. 그의 영화는 세상이 가로막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가로막힌 벽을 뚫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분노를 덤덤히 표현했고 때로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안겼다. 참담해서 주먹을 부르쥐게 되는 장면도, 내민 손을 잡고 넘어진 몸을 일으켜 세우는 느낌이 드는 장면도 특별한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루해서 눈이 감겨버릴 것 같은 나와 내 이웃들의 이야기였다.


작고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 큰 울림을 만들어내는 고로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는 그의 작은 생각들이 모여 얼마나 큰 울림을 만들어 내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거장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주변인들을 추모하는 마음, 영화에 대한 애정 등, 그의 작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소설가는 소설로 음악가는 음악으로 영화감독은 영화로 만나겠지만 팬들은 스타의 신발 사이즈까지도 알고 싶어 하는 법이다. 책을 읽으면 고급스럽게 정돈된 방은 아니지만 습관을 엿볼 수 있거나 애정 하는 소품 등이 곳곳에 널려있는 스타의 방에 초대된 느낌이 든다. 영화감독이란 타이틀을 벗고 편안히 만나는 그의 모습은 조금 더 솔직하고 시원시원하다.


축의 말고 지원금을 더 달라고 일침을 놓기도 하고 귤도 바다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 전달 과정에서 덧붙거나 변색되고 마는 통번역의 묘미를 수려한 문장으로 풀어놓기도 한다. '넌 나를 위해 뭘 해 줄 수 있어?'라고 묻는 나와 달리 그는 '내가 영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스케일이 남다른 질문을 던진다. '정치인들의 어리광은 민폐다, 미국이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라고 불리는 모양이다'라고 가슴 서늘해지게 쓴소리도 날렸다. '자기표현'이란 말에서 모놀로그적인 '일방통행'의 냄새가 난다며 영화는 모놀로그(혼잣말)가 아닌 다이얼로그(대화)'를 목표로 한다고 자신의 영화 철학을 적절한 비유로 전하기도 한다.


웅덩이가 생기면 사람은 처음으로 물을 의식한다. 그 의식이 쌓여 비로소 '앎'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p22


그는 이렇게 글을 통해 그만의 웅덩이를 파고 있었다. 그가 파 놓은 각양각색의 웅덩이들을 구경하는 것은 책장 넘어가는 소리조차 아쉬운 시간들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그 웅덩이에 물이 고였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들을 만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 속에서 비친 세상을 나의 눈으로 읽어갈 것이다. 다양한 물을 담을 웅덩이를 그가 영화에서든 글에서든 계속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작고 사소하기에 큰 이야기가 할 수 없는 독창적이고 세심한 이야기들 계속 만나고 싶다.


책의 끝부분에 실린 정성일 평론가와의 대담 마지막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 그 무엇보다 그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오면 스스로 힘을 얻기 위해 했던 말, 그 말이 무엇인지를 자신들에게 나눠주면 힘든 순간이 왔을 때 자신들도 그 말을 부적처럼 쓰고 싶다'는 학생들의 간절한 부탁을 전한다. 그 진지한 물음에 그 '힘들지 않아요'라는 단호한 대답. 이어지는 좌중 웃음. 경쾌한 그의 말과 함께 동시에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를 상상해보며 책을 덮었다. 작은 웅덩이 속 세상이 조화롭게 콜라주 되는 모습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BTS 오디세이' 목숨을 건 비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