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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Oct 31. 2021

It means nothing to me

테디 웨인의 '아파트먼트'를 읽고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넌 제일 두려운 게 뭐냐?

아마 나를 정말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거겠지.

너는?

나한테는 영원히 망가져버린 부분이 있는 것 같아. 그리고 그건 내가 혼자 남게 될 거라는 뜻이고. 아니면 설령 혼자 남지 않더라고 혼자라고 느낄 거라는 얘긴데, 그건 어쩌면 더 나쁘겠지.

테디 웨인 <아파트먼트> p156

 

뉴욕시 빈 공터에서 달을 보며 유대감을 다지는 두 남자가 있다. 두 남자는 두려운 것들을 적어 병에 넣어 강물 속으로 풍덩 던진다. "날 받아줘서 고마워"란 대사에 이 책을 덮어버릴 냉소적인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어릴 적 동경했던 기숙사를 배경으로 하는 명랑소설 속 여주인공이 했을 법한 대사에 여지없이 속아서 밑줄을 긋는다.


버디영화의 한 장면을 충실히 연기해내고 있는 두 주인공은 ''와 빌리다. 그들은 컬럼비아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에서 만난 작가 지망생이다.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처럼 운명같이 서로를 알아보았고 ''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꿈꾸며 빌리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한다. 미국 중산층 계급으로 자라온 ''는 전문직 아버지 덕분에 크게 돈 걱정 않고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지만 '사교에 필요한 근육들은 쪼그라들어' 긴장하면 땀으로 몸이 뱀장어 몸통처럼 번들거리는 관계 기피증을 가진 인물이다. 반면 잘 생긴 외모에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빌리는 작가로서 타고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길러줄 부모도 돈도 없는 시골 출신으로 생활고에 허덕이는 인물이다. 금수저와 흙수저, 여성성과 남성성, 진정성과 재능 , 민주당과 공화당, 관계의 깊이를 좌우하는 여러 요소들이 다분히 이분법적으로 형상화되었음에도 '나'와 '빌리'는 둘 다 미워하기도 옹호하기도 힘든 인물들이다.


동거 생활에 들어간 두 주인공은 절대 보지 않을 것 같던 영화를 함께 보며 눈물을 흘리고, 지겨운 낭독회 시간에 비밀을 공유한 사람처럼 둘만 키득거리며 친밀감을 쌓아가는 등 버디 영화 수순을 충실히 따른다. '우정'이란 가치가 주는 기쁨을 다 잊은 철벽 같은 어른을 무장해재 시키기 위해 작가는 무척 노력했고 순진한 독자인 나는 향수에 빠져 '소울 메이트' 같은 단어들을 떠올렸다. 작가가 쳐 놓은 그물을 향해 자진해서 성큼  다가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의 고유성은 남과의 차이가 드러날 때 더 명확해지는 것일까. 서서히 서로의 다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음악, 영화 등 문화적 취향의 차이는 접점을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15달러를 2주간의 참치값에 견주는 비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와 사사건건 돈타령을 하지만 그 혜택을 절대 거부하지 않는 빌리. 지하철 부랑자에게는 1달러도 건네지 않지만 성도착증 수술 기부금 모금통엔 5달러를 넣는 '나'와 작품은 리버럴 하지만 정치적 성향은 보수적이기 그지없는 빌리. 경제적 격차는 우월감이나 자격지심 사이에서 둘 사이의 격차를 더 멀어지게 했고 정치적 견해차는 불화의 원인이 되어 서로 입을 다물게 했다. 보이지 않는 심리적 거리감은 마치 단단히 얼지 못한 강이 작은 충격에도 실금이 가고 어린아이의 뜀박질 한 번에 손쓸 틈 없이 와장창 깨지고 마는 것처럼 그들 사이도 실금이 생겨난다. 그리고 어느 날 꽝하고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더 이상 빌리의 재능은 존경과 응원의 대상이 아닌 질투로, 외로움과 고난을 막아주던 아파트는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무기로 바뀌고 만다.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는 서로가 앙숙이 된 채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결혼 후 원수가 되어가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그래서 더 비현실적인 인생 스토리의 결말 아닌가. 힘껏 온몸으로 껴안아도 심장은 결코 포개어져 하나가 되지 못한다. 그 근원적 외로움을 어느 시인은 '선천성 그리움'이라 노래하기도 했다. "내가 다시 집세 낼게."라고 안간힘을 쓰며 그 세계를 지켜보려 애쓰지만 알은 깨지고 '나'는 아파트에서 쫓겨나고 빌리와 이별한다. 해피엔딩이 드문 현실을 작가는 충실하게 소설에 반영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저수지가 끝없이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나라는 인간의 껍질에서 가장 뚫고 들어가기 힘든 층은 여전히 늘어나고 있으며, 빌리는 내가 그 안으로 들어오게 허락하는 일에 가까이 갔던 마지막 사람이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테디 웨인 <아파트먼트> p287


다가서려다 남에게 받는 상처가 괴로움, 물러서서 감수해야 하는 것이 외로움.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 외로움에 더 익숙해져 버리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일까? 헤르만 헤세는 성장한다는 건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라 했지만 상처 없이 내 세상을 깨고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데미안은 성장소설의 모범생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 시절이 좋았는데' 하고 미성숙했고 고립되었지만 안전하다고 느꼈던 알 속의 그 시절을 무한히 그리워하기도 한다. 테디 웨인은 소설 <아파트먼트>를 통해 성장한다는 것은 '타인의 경계가 그려내는 특별한 윤곽선은 우리 자신이 그것과 충돌하고, 남은 평생 동안 사라지지 않을 커다란 구멍을 남기(p286)'는 것이 아니냐고 물음을 던진다. 알을 깨고 나왔지만 결코 심장은 포개어질 수 없음을 알아가는 성장과정은 아름답기에 더 잔혹하다.


삶의 통찰이 참신한 비유의 힘을 빌려 곳곳에서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책이었다. 문장들을 갈무리하기 위해 책을 처음부터 다시 넘긴다. 비판을 위한 비평들이 넘쳐나고 자신의 지식을 뽐내기 위해 어려운 용어를 남발하는 치기 어린 열정이 컬럼비아 대학 문예창작 수업에 가득하다. 그들의 허영심과 열정에 나도 무임승차하여 지적인 분위기 다시 한번 흠뻑 빠져든다. 손이 아프게 문장들을 따라 쓰다 '우리의 덧없는 청춘을 증거로 남기기 위해 찍은 사진' 등 무심히 보고 넘긴 한 장면이 복선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무릎을 치기도 하는데 이런 즐거움은 이 소설이 주는 소소한 보너스다. '울트라 복스'의 <비엔나>를 배경음악으로 틀었다. 세차게 심장 뛰는 소리소리로 시작되어 'It means nothing to me'로 마무리되는 그 곡을 그들처럼 나도 반복해서 듣는다. 그것이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애절하게 절규하진 않았으리라. <비엔나>를 따라 부르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을 달리는, 그들의 로드무비는 다시 읽어도 통속적이다. 그러나 평범한 건 때때로 특별함보다 귀하기에 그 장면은 결말과 상관없이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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